하루 사이에 형세가 급변하고 있다. 특별법 대 특검제라는 여야간 대립 구도는 깨졌다. 자고나니 특별법 제정은 대세가 됐다. 민노당과 민주당 모두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불법 도청 행위에 대한 수사는 이견이 없고, 두 야당이 특별법 제정에 동의한 만큼 불법 도청 내용 공개라는 큰 원칙도 섰다. 남는 문제는 수사와 공개를 누가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불법 도청 행위 수사는 검찰이, 불법 도청 내용 공개는 민간기구가 맡아야 한다는 게 열린우리당 입장인 반면, 불법 도청 행위 수사와 불법 도청 내용 공개 모두 특검에 넘겨야 한다는 게 민노당 입장이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 안에 가깝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실무 방법론에 관한 문제다. 풀지 못할 난제는 아니다. 열린우리당이 “검찰 수사를 봐서 특검제 도입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신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고, 청와대가 민간기구에 의한 불법 도청 내용 공개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힌 점을 감안하면 대타협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
형세가 급변하면서 점차 고립되는 곳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도 지난 며칠간 입장을 큰 폭으로 조정해가며 기민하게 대처해왔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였다. 박근혜 대표는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 전부를 공개해도 상관없다고 밝혔지만 강재섭 원내대표는 불법 도청 행위만 수사해야 한다고 폭을 좁혔다. 이러다보니 특검 수사 대상도 ‘불법 도청 행위+α’였다가 ‘α’를 빼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이 아직 ‘완전 고립’된 건 아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일부 신문이 사설을 통해 특별법 제정 시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그 어떤 사안보다 여론전이 절실한 상황에서 일부 신문이 한나라당 입장을 거들고 있으니 우군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판세로 봐선 역부족이다. 일부 신문이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고는 하나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에 묻히는 형국이다. 현실 정치에서도 한나라당이 수적 열세로 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 그리고 한나라당 입장에 동조하는 일부 언론이 모색할 수 있는 돌파구는 뭘까?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오늘자 <중앙일보>다.
<중앙일보>는 두 가지 의제를 던지고 있다. 하나는 법 논리다. 불법 도청 내용을 공개하는 게 과연 헌법에 부합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95년 제정된 ‘5.18관련 특별법’이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섰던 전례를 거론하면서 당시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위헌이란 의견을 냈지만 한명이 모자라 위헌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불법 도청 내용 공개를 위한 특별법이 헌재 심판대에 설 수도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제기한 또 하나의 의제는 역사 논리다. <중앙일보>는 오피니언 면에서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와 이세정 <중앙일보> 정책기획부 차장의 글을 게재했는데, 두 글 모두 “과거사, 청산만이 능사 아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과거에 매달린 동안 국가 경쟁력은 갈수록 격차”(이세정)가 벌어졌다면서 “과거를 제거나 청산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선진화의 길은 요원하다”(김일영)는 것이다. 또 “민주화 세력이 무결점과 무오류라는 신화 위에서 건국과 산업화 세력을 단죄하는 것을 과거사 청산 작업의 전부로 오해”하는 “집권세력의 잘못된 역사의식”(김일영)을 질타하기도 했다.
두 글이 소재로 삼고 있는 건 불법 도청이 아니다. 두 글 모두 광복60주년에 즈음해 한국의 현재를 조명하는 글이다. 하지만 불법 도청 테이프에 담긴 ‘과거사’의 진상 규명 요구가 비등한 현 상황에 비춰볼 때 오비이락이라고 치부하기엔 글의 ‘근접도’가 너무 높다.
가닥이 잡히고는 있다지만 굳어진 건 아니다. 우선 특검제든 특별법이든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시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민노당이 임시국회를 즉각 소집하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입법 절차가 완료된다 해도 특검이 임명돼 수사에 착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길게는 수개월이 걸릴 이 과정 동안 지금의 상황을 변화시킬 요인은 많다. ‘광복60주년’이 ‘과거사 청산’ 여론을 조성할지 ‘미래를 위한 대화합’ 여론을 조성할지는 미지수다. 10월이 되면 국회의원 재보선이 실시된다. 그 결과에 따라 국회 의석분포가 달라지고 정국 흐름도 달라질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 도청 내용 공개를 100%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특별법은 제정과 동시에 헌재 심판대에 회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불법 도청 내용 공개는 지금 운위되는 특검이나 민간기구가 아니라 헌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불법 도청 내용 공개를 둘러싼 공방전은 이제 초입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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