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가명)이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목격자 이모씨 제공
그러나 이례적으로 석 달 반 동안이나 끌어오던 사건은 결과적으로 제이슨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8월 3일, 사건담당 통역관이 "검찰이 증거불충분에 따른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고 전해온 것.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으로 예상했고 담당 수사관도 그렇게 암시를 했었지만, 법원 판결을 받을 기회조차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전씨는 "피해자, 목격자의 정확한 진술은 물론 나를 공격한 망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증거 불충분이 될 수 있느냐"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혼란스럽다"고 항변했다.
또하나의 사건
이에 앞서 7월말, 영국법정은 부부싸움 도중 사망한 한국인 아내를 토막 내 유기하고, 도주했다가 자수한 영국인 남편사건에게 '5년형'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내려 한인 사회를 들끓게 했다.
2004년 6월 8일, 한국 여성 강모씨(당시 38세)가 자신의 집 냉동고에서 토막난 사체로 발견됐다. 이어 13일 뒤인 21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던 영국인 남편 폴 달튼(35)이 히스로 공항에서 체포돼 1급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조사내용은 이랬다. 폴 달튼은 부부 싸움 도중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해 주먹으로 아내 강씨의 안면을 공격, 턱뼈가 부러진 채 실신해 쓰러진 강씨를 방치한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폴 달튼이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이미 강씨의 호흡은 정지한 상태였다(부검결과는 출혈로 인해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나왔다). 그는 강씨의 사체를 토막낸 뒤 비닐에 담아 냉동고에 넣은 뒤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13일 만에 경찰의 설득이 담긴 이메일을 받고 히스로 공항으로 입국하는 길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1급살인 사건으로 기소돼 당초 중형이 예상됐던 폴 달튼에게 영국법정은 1년여 간의 재판을 거쳐 지난 7월 25일 최종형량을 선고했으나 살인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과실치사 혐의로 2년형, 사체유기 혐의로 3년형. 배심원들이 달튼에게 살인의도가 없었다고 인정하며 살인죄에 대해 무죄를 평결했고, 담당판사도 '살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
"제도화된 인종주의 때문"
위 두 사건에 대한 잇따른 이례적 처리(판결)에 대해 영국 내 한인사회에서는 소수인종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각이 적용돼 가해자 편들기를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망치사건'의 경우, 사건 당시 사진과 가격한 망치 등 명백한 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자국민 편들기라는 것. 더욱이 흉기(망치)를 이용한 의도적 공격일 경우, 일반 폭행죄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전씨는 이번 결과에 대해 "영국 내 소수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검찰의 시각이 공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씨는 이어 "(사건관련) 정확한 자료를 남기는 일에 힘쓰려고 한다"며 "기회가 되면 이번 사건이 영국 내 인종차별과 영국경찰과 검찰의 인종차별적 조치의 실례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밝혔다.
▲강씨 사건에 대해 영국언론 보도의 대부분은 강씨가 소위 못된 여자인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가십화 되고 있다. 사진은 지역신문인 <킹스턴 인포머>에 실린 머릿기사.
강모씨 사건의 경우, 최종 형이 확정된 후 열린 사건 설명회에서 서튼경찰서 강력계 수석형사 폴 맥칼리넌은 "영국 법체계 하에서 5년형은 과실치사 혐의로 받게 되는 평균적인 형량"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과연 공정한 수사와 재판과정을 통해 그런 형량이 나온 것인지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이 사건을 취재한 MBC 이동희 피디는 재판장에 참석해 지켜봤던 대부분의 교민들은 이번 재판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검사가 제시한 증인은 달튼의 부모와 달튼과 불륜관계에 있던 모 여성뿐이었으며, 검사는 변호사의 변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않고 중대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피의자 달튼은 '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평소 강씨가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언어 폭력 등을 통해 자신에 많은 고통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재판과정을 취재한 영국의 중앙, 지역언론들도 앞 다투어 강씨가 얼마나 '못된' 여자였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했다. 사건 자체가 가십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영국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위 두 사건과 관련해 5년째 영국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의문사 문제와 싸우고 있는 고 이경운군의 부친 이영호씨는 "영국 내 공공기관 특히 사법기관, 경찰에 잠재해 있는 '제도화된 인종차별' 태도를 고려할 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결과"라고 견해를 밝혔다.
▲전호중씨의 옷에 흘러내린 피.목격자 이모씨 제공
이씨는 "제도화된 인종 차별은 공공 기관 내 깊숙히 뿌리박힌 관행이어서 업무를 처리하는 당사자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밝혀내고 잘못을 시인하도록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평했다.
영국 내 제도화된 인종차별 문제는 스테판 로렌스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1993년 흑인 청년 스테판 로렌스(18)는 버스 정류장에서 백인 불량배들의 칼에 찔려 사망했으나 용의자 백인들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6년간 유가족의 끈질긴 싸움 끝에 영국 경찰이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사건을 처리했음이 드러났고, 이로서 영국 공공기관에 잠재해 있는 '제도화된 인종차별' 문제가 낱낱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경찰 고위 관리 11명이 해직 당하는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지난 달 리버풀에서는 흑인 고등학생 앤소니 워커(18)가 백인 청년이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유가족들은 사건 발생 후 추모 집회에서 "범인들이 길거리를 더이상 걸어다녀서는 안된다, 반드시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3천 여명이 참가한 촛불시위가 열리며 영국 주요 언론의 머릿기사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번 한국 교민들이 겪은 두 사건은 영국 내 사법, 행정 등 공기관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이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의심케 만들고 있다. 또 한인사회에는 한국교민들이 사건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 |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판결 받았다" | | | 망치 폭행 피해자 전호중씨 인터뷰 | | | | -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떤가. "지금은 괜찮다.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결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피해자, 목격자의 정확한 진술은 물론 (나를) 공격한 망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증거 불충분이 될 수 있나. 도착했던 경찰도 내가 피를 많이 흘리는 것도 봤다."
- 불기소처분을 공식적인 문서나 담당 검찰 측으로부터 통보받은 것인가. "통역관을 통해 전화로 들었다. 검찰 공식 문서는 아직 받지 못했다. 담당 수사관도 장기(5주) 휴가 중이라 당장 연락이 닿질 않는다. 경찰 측에서는 이 건은 이미 경찰 손을 떠난 것이라고 하더라."
- 이런 결과가 영국내 인종주의와 상관있다고 보는가. "영국 내 소수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판결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영국 내 우리나라의 위상과도 관계있다고 본다. 영국 내 한국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수도 있다. 일례로 모 한국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변호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승산없다'며 수임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 가해자와 사건 후에도 만난 적이 있나. "사건 다음날도 만났다. '어제는 즐거웠다'고 말하더라.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 몇 명을 데려온다고 해도 될 줄 아냐?'고도 했다."
- 가해자들을 처벌할 다른 대안은 없나. "영국 법상 대민 피해자에게 퇴거 명령이 가능하나 이 또한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담당 경찰관은 계속 위협을 주게될 경우 가해자를 퇴거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다. 카운슬(지방정부)에 정식 민원을 신청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려면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데 현재로선 그냥 무마된 상황이라 불가능할 것 같다."
- 대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주영한국대사관에 형사쪽의 영국법상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변호사가 없어 아쉬웠다."
- 지금 심정은 어떤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내가 인터넷에 직접 사진을 올리고 이 사실을 알려 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고 싶다. (사건관련) 정확한 자료를 남기는 일에 힘쓰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이 사건이 영국 내 인종차별과 영국경찰과 검찰의 인종차별적 조치의 실례로 사용 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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