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면 송정리 산8-1에 자리한 유창순 의사의 묘소.이진희
"할아버지는 1912년 경 의병운동부터 시작하신 분이에요. 그때부터 집에 붙어 계실 때가 없었답니다. 할아버지는 4남매의 장남이셨어요.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와 7년차, 둘째 작은 할아버지는 17년차, 막내 대고모 할머니와는 25살 차이가 났었데요. 그저 짧게는 7, 8개월 나가 계시다가 들어오시고 길게는 4~5년 밖에 계시다가 들어오시곤 하시면서 집에 머무는 기간은 보름을 넘기신 일이 없었답니다. 할아버지가 형무소에 계실 때 아버지가 참 고생이 많으셨대요. 아버지는 저녁 잡숫고 병천면 송정리에서 밤새 걸어 조치원 지나 공주교도소 까지 90리 길을 매일 걸으셔서 새벽에 면회를 다니셨답니다. 아침에 할아버지 얼굴 잠깐 뵙고 또 하루종일 집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아버님도 참 대단하셨죠"라며 희봉씨는 아버님이 떠올랐는지 한껏 미소를 짓는다.
"광복절이나 3·1절은 같은 빨간 날이지만 다가오면 참 애착이 가는 날들이죠. 자부심 갖고 살아도 좋겠다구요? 허허 그런 것은 별 기대도 안 해요. 다만 바라는 것은 한가지 있어요.
할아버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겠다고 몇 번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도 특별히 그럴 필요 없다고 병천면 송정리 산8-1번지에 있는 문중 선산에 그냥 모시고 있어요. 거기에 그저 지나는 사람들 한 번쯤 보고 갈 수 있게 그 선산 입구 도로가에 이정표라도 하나 만들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관심 있는 아이들이라도 한번 비문이라도 읽어볼 수 있게요."
유희봉씨의 행복해 보이는 넉넉한 웃음 속에 그늘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좀 더 편하고 넉넉하게 사시지 못하는 것이 주는 감정이랄까? 나도 모르게 약간의 아쉬움과 애틋함이 진하게 남는 만남이었다.
| | 건국훈장 독립장 유창순 | | | (1880. 3.17~ 1943. 10.8) | | | |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1913년 경북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했다. 주로 의병적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 계획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후 그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 이에 참가하여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蔡基中)·강순필·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칠곡(漆谷)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했으며, 이때 '처단 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됐고 1918년 일제에 붙잡혀,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민족정기선양센터(http://narasarang.mpva.go.kr)에서 발췌 | | | | |
천안지역의 독립유공자들
이맘 때가 되면 독립기념관의 도시, 천안의 거리에는 깨끗하게 걸린 태극기들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나란히 줄지어 펄럭인다. '겨레의 성지' '충절의 고장'이라는 천안에는 얼마 전까지 독립유공자 두 분이 생존해 계셨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7월의 마지막 주,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얼마 전 돌아가신 유공자는 원래 충남 아산 출신이셨지만 천안 입장면 하장리에 사시던 고 임형선 옹이다. 임형선 옹은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민중계몽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보시고, 동지 성백우(成百愚)님과 함께 조선 농민의 참상을 논하고, 일제로부터 핍박받는 농민을 구제하기 위해 농민운동을 전개하셨던 분. 정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받으셨다.
다른 한 분인 광복군 출신의 조동빈옹은 24년 생이시고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 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분이다. 요즘은 심장 쪽 혈관이 좋지 않으신 상태시지만 아직 꼬장꼬장 하시다.
그 외 다른 분들은 이미 세상을 모두 떠나셨고 현재 유공자들의 미망인 세분과 유족 33명이 천안에 적을 두고 계신 상태다.
| | 천안 삼거리 공원에 있는 팔각탑? | | | 수년간 석물점에 방치됐던 사연 | | | |
| | ▲ 천안삼거리 공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회원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會員義士光復會員記念碑)'. | ⓒ이진희 | |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늘 사람으로 북적대는 천안삼거리 공원. 지금은 한참 정비공사가 진행중이지만 천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삼거리 공원은 그저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공원이다.
비단잉어들이 떼지어 있는 구름다리를 지난 영남루가 앞에 저수지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가 하나 있고 그 근처를 조금만 더 둘러보면 팔각탑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광복회가 설립한 '독립회원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會員義士光復會員記念碑)'.
친일면장이며 독립운동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아산 도고면장을 찾아가 광복회 명의의 사형 선고문을 제시하고 즉석에서 처형시켰던 장두환 의사를 비롯해 성달영, 김정호, 조종철, 류중협, 강석주, 유창순 등 7명의 천안출신 광복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에는 사연하나가 숨어 있다. 유창순 의사의 손자 유희봉씨는 "원래 이 기념비는 천안교육청과 함께 초등학교는 10원, 중학교는 20원, 고등학교는 30원씩 성금을 걷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64년경 석물관에 맞춰 져 다 완성됐었죠. 그러다 한국일보사 기자 하나가 성금모금 내용을 보도했었어요. 외무부장관, 총리 등을 지내고 당시에도 유력자였던 장택상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한 제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다 만든 기념비를 한 5년 묵혀두었다가 그가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서야, 비로소 세울 수 있었답니다"라고 전한다.
이후 우리 지역의 광복회원들은 이분들을 말고도 권상석, 우재원, 권백초, 정한준, 마재원, 이정열, 김재호, 류중근, 이덕재, 류중석, 김정호 의사가 발굴됐다.
천안 거리 공원을 찾아 무심코 보게 되는 이 탑에는 천안지역 독립의사들의 유래와 비문, 설명과 함께 이런 사연이 숨어있다. | | | | |
덧붙이는 글 | 천안아산지역 시사주간지,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인 충남시사신문 373호(8월16일자)에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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