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증조부, 자손들이 보게 했으면"

[인터뷰] 천안 출신 이종건 의사, 유창순 의사의 후손

등록 2005.08.15 11:51수정 2005.08.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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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 광복절만큼 태극기가 마음 한곳을 저릿하게 만드는 때가 또 언제일까. 2005년은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꼭 환갑이 되는 해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무게와 함께 다가오는 이번 광복절의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조명되고 있다.

정부기관과 시민단체들은 올 초부터 행사명 앞에 '해방 60년' 또는 '광복 60년'이라는 앞에 두고 올해의 의미를 각별히 되새기고 있다. 광복절을 얼마 앞둔 지난 주, 기자는 '겨레의 성지'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천안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 이번 광복절을 맞는 그들의 감흥을 들어 보았다.

건국훈장 독립장 이종건님의 아들 이건수씨

건국훈장 독립장 이종건 의사의 후손, 이건수 박군자씨 부부
건국훈장 독립장 이종건 의사의 후손, 이건수 박군자씨 부부이진희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면사무소 뒤편의 조용한 마을에는 독립유공자 이종건 의사의 아들인 이건수(67)씨와 그의 아내 박군자(65)씨가 살고 있다.

조그만 마당을 지나 안으로 안내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후텁지근한 날씨를 잠시 잊게 해주는, 집에서 직접 만든 시원한 매실즙을 대접 받았다. 부친 얘기를 조심스레 풀어놓던 이건수씨는 방안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더니, 이런저런 서류들을 내놓았다.

비밀문서를 뜻하는 비(秘)자가 선명한 경찰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고등경찰보 제4호,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국외에서 활동하는 용의조선인 명부에는 이종건 의사의 다른 이름인 '이동초(李東初)'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가족들이 고생이 많았죠. 일경들이 밤마다 수시로 군화발로 들이닥쳐 집안을 헤집어 놓곤 했다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김구 선생님과도 가까이 지낸 걸로 알고 있어요. 임시정부 의정원(지금의 국회)에서 충청도를 대표하는 다섯 의원에도 꼽히셨습니다. 나중에 광복군에서,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가셨을 때는 초대 독립기념관장이자 안중근 의사의 당질이신 안충근 선생하고 같이 훈련을 받으셨다고 합디다."


하지만 왜경에게 이미 테러를 당하신 경험도 있었고 극도의 긴장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탓에 46년 귀국할 당시의 이종건 의사는 안타깝게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건수씨는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더듬는다.

"당시 휘문보고를 다니시다 독립운동에 나섰던 아버님을 두고, 어른들은 모두 나중엔 장관 자리 하나쯤은 깔고 앉을 거라고 몰래 수군거리시곤 하셨죠. 머리가 아주 비상하셨다 그래요. 정신병과 함께 돌아오신 아버지였지만 원망은커녕, 그저 경외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죠. 가끔씩 산 같은 데를 들어가시면 나무 뿌리며 버섯 같은 것들을 그냥 생으로 잡수시곤 하던 모습을 뵈었습니다. 매복 상황이거나 일병에게 포위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버님은 그렇게 사셨나 봐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셨는데 결국 허무하게 앓으시다 지난 6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독립운동했다며, 어딨어?"


비밀문서를 뜻하는 비(秘)자가 선명한 경찰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고등경찰보 제4호,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국외에서 활동하는 용의조선인 명부.
비밀문서를 뜻하는 비(秘)자가 선명한 경찰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고등경찰보 제4호,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국외에서 활동하는 용의조선인 명부.이진희
건수씨는 "아버님들이 그 고생을 해주시며 세운 나라지만, 후손으로서 지금에 와서 보면 참 그래요. '할 수 없지'하고 포기하면서도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언론, 방송에서는 광복절이다 하면 잠깐 반짝 돌아볼 뿐, 그날만 지나면 뭐 남는 것이 있나요? 특히 광복회원들은 조상님들 이름 욕되게 할 일 있나, 구차스럽다며 정부나 어디에 뭘 요구하거나 바라는 것도 사실 거의 없었죠. 차츰 유공자들이 돌아가시면서 줄어드는 이유도 있겠지만, 국가 원호 부문에서는 가장 홀대받는 유공자들 일겁니다"라고 말한다.

원호는 그렇다 쳐도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유공자 자녀로서 어깨를 펴고 떳떳해 하기도 쉽지 않은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3·1절이나 광복절 때면 광복회원들에게 공문이 하나 옵니다. 행사일 앞뒤로 3일 동안 기차나 시내버스 등을 광복회원증만 보여주면 무료로 탈 수 있다는 대단치 않은 내용이죠. 얼마 전 3·1절에 시내버스를 타면서 마침 잔돈이 없어 약간 망설이다가 광복회원증을 보여주었습니다. 버스기사가 대뜸 '아니 이게 뭐라고 돈을 안내냐'며 뒤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통에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나중에도 두고두고 씁쓸합디다"라는 건수씨의 경험담은 안타까움을 넘어 은근히 화가 날 정도였다.

"다른 것은 괜찮아요. 바랄 것도 없구요. 다만 명예만은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제 손주들하고 독립기념관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손주 녀석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독립운동했다며, 왜 여기 없어?'라고 물을 때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거 딱 하나 바라고 싶어요. 독립기념관에 조그만 공간을 마련해서 지역별 독립운동가들을 조그만 이름 석자라도 찾을 수 있게 해 줬으면요. 멀리서 찾아온 이들이 우리 지역에서 사시던, 활동하시던 운동가들을 알 수 있게 또 그분들의 손자·손녀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말입니다."

나중에 본인 자손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어떡하겠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마는 현실. 유공자, 유족들이 광복절에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건국훈장 독립장 이종건
(1906. 5.14~ 1960. 6.19)

독립유공자 이종건(李鍾乾)의사는 이동초(李東初), 이세장(李世章) 등 세가지 이름을 두루 쓰셨다.

1928년 휘문보고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31년 북경(北京)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입하고, 일경의 밀정 신모(申某)를 주살한 뒤 상해로 피신했다.

동년 10월 대한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민정결찰)에 임명되어 출입국자들의 신상파악과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에 전념했다. 같은 해 12월 24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출되어 1933년 3월 6일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했다.

1933년 박찬익(朴贊翊) 등과 한국독립당 남경지부 간부로 활동했으며,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남경에 체제하면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해 1936년 봄에는 동당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2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44년 3월에는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 민족정기선양센터(http://narasarang.mpva.go.kr)에서 발췌

대한민국 건국장 독립장 유창순님의 손자 유희봉씨

대한민국 건국장 독립장 유창순 의사의 손자 유희봉씨.
대한민국 건국장 독립장 유창순 의사의 손자 유희봉씨.이진희
천안시내에서 풍세면으로 빠져드는 길을 타고 가다 보면 길 가장자리마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이 쭉쭉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하지만 신방동 맨 가장자리 통세골이 나오기 바로 전까지 그 옆으로 펼쳐진 요즘 논 들녘은 막 이삭이 패기 직전의 벼들로 아주 파릇파릇하다.

어렵사리 연락된 독립유공자 유창순님의 손자인 유희봉(63)씨는 문화동에 살지만 바로 이곳에 농사처를 두고 있다. 가운데만 잡초가 길게 자란 논둑길로 조심조심 차를 몰아 들어가니 유희봉씨는 혼자 논에 농약을 대느라 여념이 없다. 처음 만났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생각보다 시원한 논 옆의 농막에 박스를 뒤집은 자리를 만들어 내내 웃는 낯으로 편안한 인터뷰를 나눴다.

"나도 잘은 몰라요. 워낙 종적이 묘연하시니... 오죽하면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뭐하고 다니시는지 왜경한테 붙잡히기 전까지는 몰랐다니까요. 할아버지는 병천면 송정리서 나셨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은 경북 영주 풍기읍에서 주로 하셨다네요. 거기 있다가 대구에서 광복회와 합류한 뒤, 1917년 장두환(張斗煥)씨하고 당시 경북 칠곡의 최대 부호이자 친일파였던 장승원(張承遠·48년 초대 외무부장관이요 52년 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씨를 암살했었답니다."

워낙 날래고 신출귀몰했던 조부였지만 해가 바뀌고 난 뒤, 밀고에 의해 천안경찰서에서 붙잡혔고 결국은 15년을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됐다고.

"유품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도망 다니시는 분의 유품은 곧 증거물이잖아요. 동네사람들은 물론 가족들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시는 줄 아무도 몰랐었다고 하더라구요."

희봉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당시 형 집행 확정 당시 받은 판결문의 사본과 조그만 명함 사진이 전부다.

90리길 걸어서 면회다니시던 아버지

병천면 송정리 산8-1에 자리한 유창순 의사의 묘소.
병천면 송정리 산8-1에 자리한 유창순 의사의 묘소.이진희
"할아버지는 1912년 경 의병운동부터 시작하신 분이에요. 그때부터 집에 붙어 계실 때가 없었답니다. 할아버지는 4남매의 장남이셨어요.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와 7년차, 둘째 작은 할아버지는 17년차, 막내 대고모 할머니와는 25살 차이가 났었데요. 그저 짧게는 7, 8개월 나가 계시다가 들어오시고 길게는 4~5년 밖에 계시다가 들어오시곤 하시면서 집에 머무는 기간은 보름을 넘기신 일이 없었답니다. 할아버지가 형무소에 계실 때 아버지가 참 고생이 많으셨대요. 아버지는 저녁 잡숫고 병천면 송정리에서 밤새 걸어 조치원 지나 공주교도소 까지 90리 길을 매일 걸으셔서 새벽에 면회를 다니셨답니다. 아침에 할아버지 얼굴 잠깐 뵙고 또 하루종일 집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아버님도 참 대단하셨죠"라며 희봉씨는 아버님이 떠올랐는지 한껏 미소를 짓는다.

"광복절이나 3·1절은 같은 빨간 날이지만 다가오면 참 애착이 가는 날들이죠. 자부심 갖고 살아도 좋겠다구요? 허허 그런 것은 별 기대도 안 해요. 다만 바라는 것은 한가지 있어요.

할아버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겠다고 몇 번 연락이 왔었어요. 그래도 특별히 그럴 필요 없다고 병천면 송정리 산8-1번지에 있는 문중 선산에 그냥 모시고 있어요. 거기에 그저 지나는 사람들 한 번쯤 보고 갈 수 있게 그 선산 입구 도로가에 이정표라도 하나 만들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관심 있는 아이들이라도 한번 비문이라도 읽어볼 수 있게요."

유희봉씨의 행복해 보이는 넉넉한 웃음 속에 그늘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좀 더 편하고 넉넉하게 사시지 못하는 것이 주는 감정이랄까? 나도 모르게 약간의 아쉬움과 애틋함이 진하게 남는 만남이었다.

건국훈장 독립장 유창순
(1880. 3.17~ 1943. 10.8)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1913년 경북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했다. 주로 의병적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 계획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후 그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 이에 참가하여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蔡基中)·강순필·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칠곡(漆谷)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했으며, 이때 '처단 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됐고 1918년 일제에 붙잡혀,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민족정기선양센터(http://narasarang.mpva.go.kr)에서 발췌

천안지역의 독립유공자들

이맘 때가 되면 독립기념관의 도시, 천안의 거리에는 깨끗하게 걸린 태극기들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나란히 줄지어 펄럭인다. '겨레의 성지' '충절의 고장'이라는 천안에는 얼마 전까지 독립유공자 두 분이 생존해 계셨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7월의 마지막 주,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얼마 전 돌아가신 유공자는 원래 충남 아산 출신이셨지만 천안 입장면 하장리에 사시던 고 임형선 옹이다. 임형선 옹은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민중계몽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보시고, 동지 성백우(成百愚)님과 함께 조선 농민의 참상을 논하고, 일제로부터 핍박받는 농민을 구제하기 위해 농민운동을 전개하셨던 분. 정부로부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받으셨다.

다른 한 분인 광복군 출신의 조동빈옹은 24년 생이시고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 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분이다. 요즘은 심장 쪽 혈관이 좋지 않으신 상태시지만 아직 꼬장꼬장 하시다.

그 외 다른 분들은 이미 세상을 모두 떠나셨고 현재 유공자들의 미망인 세분과 유족 33명이 천안에 적을 두고 계신 상태다.

천안 삼거리 공원에 있는 팔각탑?
수년간 석물점에 방치됐던 사연

▲ 천안삼거리 공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회원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會員義士光復會員記念碑)'.
ⓒ이진희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늘 사람으로 북적대는 천안삼거리 공원. 지금은 한참 정비공사가 진행중이지만 천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삼거리 공원은 그저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공원이다.

비단잉어들이 떼지어 있는 구름다리를 지난 영남루가 앞에 저수지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가 하나 있고 그 근처를 조금만 더 둘러보면 팔각탑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광복회가 설립한 '독립회원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會員義士光復會員記念碑)'.

친일면장이며 독립운동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아산 도고면장을 찾아가 광복회 명의의 사형 선고문을 제시하고 즉석에서 처형시켰던 장두환 의사를 비롯해 성달영, 김정호, 조종철, 류중협, 강석주, 유창순 등 7명의 천안출신 광복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에는 사연하나가 숨어 있다. 유창순 의사의 손자 유희봉씨는 "원래 이 기념비는 천안교육청과 함께 초등학교는 10원, 중학교는 20원, 고등학교는 30원씩 성금을 걷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64년경 석물관에 맞춰 져 다 완성됐었죠. 그러다 한국일보사 기자 하나가 성금모금 내용을 보도했었어요. 외무부장관, 총리 등을 지내고 당시에도 유력자였던 장택상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한 제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다 만든 기념비를 한 5년 묵혀두었다가 그가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서야, 비로소 세울 수 있었답니다"라고 전한다.

이후 우리 지역의 광복회원들은 이분들을 말고도 권상석, 우재원, 권백초, 정한준, 마재원, 이정열, 김재호, 류중근, 이덕재, 류중석, 김정호 의사가 발굴됐다.

천안 거리 공원을 찾아 무심코 보게 되는 이 탑에는 천안지역 독립의사들의 유래와 비문, 설명과 함께 이런 사연이 숨어있다.

덧붙이는 글 | 천안아산지역 시사주간지,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인 충남시사신문 373호(8월16일자)에 송고.

덧붙이는 글 천안아산지역 시사주간지,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인 충남시사신문 373호(8월16일자)에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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