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시드니에서도 하나 됐다

[현지리포트] 시드니한인회, 광복절 행사에 북 외교관들 초청

등록 2005.08.15 16:06수정 2005.08.16 11:38
0
원고료로 응원
호주 남북한 외교관들과 교민 400여명이 15일 오전 시드니 한인회관에 모여 광복60주년 행사를 함께 치르고 있다.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
호주 남북한 외교관들과 교민 400여명이 15일 오전 시드니 한인회관에 모여 광복60주년 행사를 함께 치르고 있다.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윤여문
남북이 하나 되어 광복 60주년을 맞는 한반도의 뜨거운 열기가 '두둥실~' 태평양을 건너 호주에도 전해져온 것일까. 남북 외교관들이 함께 참여한 광복60주년 시드니 행사가 겨울 한복판을 지나가는 호주의 추위를 훈훈하게 녹여냈다.

여기엔 시드니에 거주하는 친북한계 인사들도 대거 참여해 광복60주년을 뜻깊게 기념했다. 호주한인동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또한 남북 외교관이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기념식을 치른 유일한 경우로 시드니 행사가 화해와 통일의 시대에 동참하는 해외동포 사회의 상징적 행사가 됐다.

보수 인사들 "차마 애국가를 안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호주 한인동포사회의 특성을 보여주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나이가 많은 '6.25유공자협회' 회원 중 소수가 사전합의를 깨고, 아리랑을 합창하는 순서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

그러나 순서에 없는 애국가를 부르고, 사전에 합의한 '광복60주년 경축 만세삼창' 대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일부 인사까지 포함한 참가자 전원이 마지막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청껏 불러 생각은 다르지만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행사를 방해했다고 볼 수 있는 쪽에서 오히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한 번 더 부르자"고 제안, 그 노래를 다시 부르는 순간 몇몇 노인들은 눈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노인은 "이민 온 지 30년이 넘었다. 아무리 남북화합을 부르짖는 것도 좋지만 광복절에 차마 애국가를 안 부를 수는 없었다"면서 "주최측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해외동포 입장도 이해해주어야 한다. 나는 결코 '보수꼴통'이 아니다"고 강변했다.

이날 행사를 기획, 진행한 고직만 시드니한인회 사무총장은 "아쉽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면서 "그래서 아리랑의 피아노 반주를 중단시키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차마 애국가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광복60주년 만세. 왼쪽부터 김창수 총영사, 백낙윤 한인회장, 김창렵 참사
광복60주년 만세. 왼쪽부터 김창수 총영사, 백낙윤 한인회장, 김창렵 참사윤여문
남북화해의 장에 동참한 호주동포사회

8월 15일 오전 11시, 시드니 서남부지역에 위치한 시드니한인회관에서 광복6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청중은 준비한 의자가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한인회가 주최한 역대 행사 중 가장 많은 400여명이 모인 것.


한국과는 달리 공휴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결과였다. 무엇이 그들을 한인회관으로 모이게 만들었을까. 이스트우드에 거주하는 이옥정(53)씨는 "해외에서 열린 광복60주년 행사 중 유일하게 시드니에서만 남북이 함께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회사까지 빠지고 참석했다"면서 "이런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는 기회를 갖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라며 참가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행사 1시간 전 만난 한인회 관계자들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파행을 염려했다. 무대엔 태극기 대신 한반도 통일기가 걸리고, 애국가 대신 아리랑을 부를 것이라는 뉴스가 나가자 일각에서 "가만있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행사시작 20분 전 김창수 시드니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와 김창렵 캔베라 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참사가 연이어 도착하자 행사장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백낙윤 시드니한인회 회장, 버지니아 저지 NSW(뉴사우스웨일스 주) 하원의원 등과 함께 단상에 앉은 두 외교관은 시종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사회를 맡은 고직만 한인회 사무총장은 시드니 공동행사의 성격과 양측 합의사항을 일일이 설명하고, 원만한 진행을 위해 동포들이 협조해달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는 등 여느 때 같으면 챙기지 않을 발언을 꼼꼼하게 이어갔다.

그러나 국민의례 순서가 되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한반도기와 호주국기에 대한 경례, 호주국가 제창에 이어 애국가 대신 아리랑을 부르면서 행사장이 술렁댔고, 마침내 한쪽에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단상에 앉아있던 김창렵 북한대사관 참사와 박관옥씨 등은 아연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무대 앞쪽만 응시했다. 다행히 파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20여 명이 부르는 애국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리랑을 합창하고, 다음 순서인 광복절노래 제창이 울려 퍼지면서 행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완전한 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해외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함께 하는 광복절 행사를 하게 되어 긍지를 느낀다"는 백낙윤 한인회장 개회사에 이어 등단한 김창수 총영사는 "광복60주년을 자축하면서 남북이 하나 되는 완전한 광복이 이뤄질 때까지 서로 참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김창렵 참사는 "조국광복 60주년 행사에 초청해준 시드니한인회에 감사한다"면서 "평양에서 열린 6.15선언 기념행사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절 행사 등으로 우리 민족은 화해와 단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 도중 '북남'이 아닌 '남북'이라는 용어를 여러차례 써서 눈길을 끌었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그가 화합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아멘'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한편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등장한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축사를 통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남북이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면서 "오늘은 호주의 '태평양 승리의 날(VP Day)'이기도 한데 남북 외교관들이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올림픽 때와 같은 진한 감동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2부 순서로 진행된 경축행사에서는 광복과 통일을 염원하는 시낭송과 축하음악회 등이 이어졌다. 박사슴씨가 통일염원의 시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와 문병란 시인의 '직녀에게'를 낭송했고, 테너 이나리씨가 축가로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왼쪽부터 버지니아 저지 의원, 김창수 총영사, 김창렵 참사, 백낙윤 한인회장.
우리의 소원은 통일. 왼쪽부터 버지니아 저지 의원, 김창수 총영사, 김창렵 참사, 백낙윤 한인회장.윤여문
시드니는 전통적인 남북화해의 장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돼 비교적 역사가 짧은 호주 한인사회의 두드러진 특성은 한국보다 보수성향이 더 강하다는 것. 물론 호주 정착시점이나 세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인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이민1세대 성향이 보수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평가에 대해선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1989년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임수경씨의 북한행을 비밀리에 도운 호주 교민 김진협(치과의사)·김승일(사회사업가)씨, 평양축전에 참가한 권기범(변호사·스트라스필드 시의원)·박은덕(변호사)·강병조(호주건설노조)씨 등이 오랫동안 동포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호주 한인사회가 북한을 항상 냉대한 것은 아니다. 1987년 시드니에서 열린 세계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에서 한국과 북한 대표팀의 대결이 벌어졌다. 당시 한인 동포들은 당초 예상과 달리 남북한을 똑같이 응원, 지원해 호주와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또 2004년 7월 호주전역에서 펼쳐진 평양예술단 공연은 대세를 거를 수 없는 남북화해 무드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전회 매진에 두 차례 앙코르 공연까지 이어졌다. 이에 대해 김형필 부총영사는 "호주가 남북한과 동시에 수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해방과 통일을 한 묶음으로

언제부턴가 해방과 통일이 한 묶음으로 거론된다. 해방이라는 국권회복과 분단이라는 민족모순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광복60주년 시드니 행사가 아직도 민족 모순의 덫에서 완전하게 풀려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다만 광복과 통일을 한 묶음으로 엮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표출됐을 따름이다. 이날 취재를 나온 호주 최대발행부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벤 샤키 기자는 이같은 현상을 궁금해 하면서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이날 처음 만난 김창수 총영사와 김창렵 참사는 끝자만 다른 이름 때문에 많은 동포들로부터 "마치 형제 같다"는 덕담을 들었다. 그들은 마지막 순서로 축배를 함께 들면서 조국통일의 염원을 기원했다.

행사가 끝난 뒤 기념사진을 찍는 김창렵 참사에게 행사 중간 해프닝에 대해 물었더니 "이해한다. 전쟁의 상처가 그런 것 아닌가. 그래서 남쪽을 방문하는 북측 대표단이 국립묘지를 참배한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서로 상처를 다독이면서 통일의 길로 가야 한다"고 답했다. 박순천씨가 낭송한 시 <직녀에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데일리 텔레그래프 벤 샤키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창렵 참사.
데일리 텔레그래프 벤 샤키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창렵 참사.윤여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2. 2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3. 3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4. 4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5. 5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