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힘들 때는 숫자를 세며 걷는다

나이 사십에 도전하는 백두대간 연속 종주 이야기

등록 2005.08.18 03:01수정 2005.08.18 11:47
0
원고료로 응원
a 삼도봉에서 본 마루금

삼도봉에서 본 마루금 ⓒ 정성필

덕산재에 가면 그 유명한 쌍용주유소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신풍령의 그 폐 휴게소와 폐 주유소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만 그곳에 물이 있고, 이슬을 피할 잠자리만 있으면 될 뿐이다.

매우 가파른 길을 내려간다. 멀리 대덕산을 볼 때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했는데, 막상 산은 그리 편하고 호락호락한 품을 허락지 않는다. 무릎이 좋지 않아서 무릎 보호대를 하고 다니는 내 형편으로는 이렇게 급한 내리막은 조심하지 않으면 대간길 내내 무릎 통증에 시달려야하는 고통이 수반됨으로 조심한다. 급한 내리막을 내려서니 완만한 구간이 나온다. 곧 덕산재가 나올듯하다. 길이 지루하다.


덕산재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주유소와 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나는 이미 거창에서 충분히 보급하고 온 터이라 그리 큰 염려는 되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 평평한 땅이 있고, 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오늘은 폐 휴게소에서 하룻밤을 잔다.

아침에는 가뿐하게 일어났다. 새벽이다. 거창에서 피로를 풀고 충분히 먹은 게 아마 큰 힘이 되었던 듯하다. 6시에 아침을 먹고, 텐트를 걷어 7시에 이동한다. 매일 매일의 반복, 밥 먹고, 텐트치고, 자고나면 텐트 걷어 이동하고, 아무래도 이게 바로 유목민의 생활 아닌가라는 생각해본다.

주유소 뒷길로 오른다. 길은 가파르다. 늘 들머리는 이렇게 가파른지, 지그재그로 나있는 길을 오른다. 가파른 길은 빠른 시간에 높은 해발 고도를 오르게 되어 좋지만 에너지 소비가 많다. 대간의 큰 배낭을 메고 이렇게 가파른 길을 가는 일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눈을 들어 보면 가파른 곳일수록 스카이라인이 파랗게 보여 기분이 좋다.

언젠가부터 그 스카이라인을 보며 시간을 생각한다. 특히 힘들 때 끝도 보이지 않을 오르막 같으면 쉬는 것보다 고개를 들어 스카이라인을 찾는다. 스카이라인이 나타나면 시간 계산을 한다. 몇 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다. 그러면 힘이 솟는다. 그만큼만 가면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오른다.

처음 힘들 땐 배낭끈이 어깨를 조여 견디기 힘들었다. 배낭무게가 무거울수록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든다. 어깨가 아파 배낭끈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해결책은 안 된다. 나중엔 배낭도 무겁고 힘들 때는 숫자를 센다. 하나부터 시작해서 백 너머까지 세다 보면 걸음도 배낭도 잊고, 무아지경으로 걸을 때도 있다.


오늘 또 숫자를 센다. 한 시간여 가니 폐광터가 나온다. 김천시장 이름으로 된 팻말인데, "폐광터가 있으니, 지반이 약하니 등산객들은 주의하라"는 표지가 서 있다. 대간길이 망가진 것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이미 폐광터이므로 더 이상 개발은 없을 것이란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오늘은 7시에 출발해서 생각보다 일찍 부항령까지 갈 듯하다. 부항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벌써 배고파지는 듯하다. 나는 가는 길 내내 길가의 참나물, 취나물이 있으면 눈에 띄는 대로 따먹으며 간다. 내 간식은 나물이다. 나물을 뜯으면 해갈이 되고, 나물에 있는 각종 영양소들이 대간길의 부실한 식사로 인해 결핍된 영양분을 채워준다.


열시쯤 되니 내 입술이 입안이 온통 새파랗게 변한 듯하다. 거울은 없지만 잇 사이에 끼인, 으깨진 나물에서 물이 흐른다. 초록의 물이 내 몸이 흐른다. 나물이 내 몸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인다.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 자연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손님일 뿐이다.

백두대간이 끝나면 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한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조용히 산속에서 산과 함께, 새소리처럼, 바람소리처럼, 물소리처럼, 자연의 음성이 되어서 조용히 산에 스미듯 살고 싶어진다.

853봉을 지나니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를 무심코 지난다. 공터가 나오는 걸 보니 곧 부항령일 듯하다. 아스팔트 도로가 나온다. 부항령이다. 점심을 먹을까 하다 시간이 이른듯하고 또 부항령에서 올라서야하는 가파른 길을 보니 밥을 먹고 올라서기는 힘들듯해서 밥은 묘지에서 먹기로 한다.

가파른 길로 삼도봉을 향해 오른다. 계속되는 가파른 길, 배낭은 거창에서 채워 넣은 온갖 것(?)들로 무겁다. 하지만 가다 먹고, 먹으면서 가다보면 줄어들 것들이라,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간다. 대간 초기에는 배낭무게 때문에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는데, 이젠 무게에 적응을 했나보다. 사람 몸은 적응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묘에서 점심을 해먹는다. 물만 붓고 밥을 하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를 꼽으라 하면 나는 서슴없이 밥 냄새를 꼽을 것이다. 산에서 밥 냄새의 매력을 알았다. 집에선 밥 냄새가 무언지도 몰랐다. 하지만 산에서 산 밥을 하다보니, 밥에도 냄새가 있었다. 구수하면서도 달콤하고 달콤하면서도 참기름 냄새 같은 게 섞여있는 밥 냄새. 어쩌면 밥을 먹는 일 보다 나는 밥 냄새가 더 좋아, 밥을 하는지도 몰랐다.

점심은 거창에서 사온 온갖 푸짐한 진수성찬으로 거하게 먹는다. 묘지는 대간종주자들에게는 훌륭한 잠자리요, 훌륭한 식탁이다. 밥을 먹고 그늘을 골라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잔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 산행을 했더니 식곤증이 몰려온다. 날이 너무 더웠다. 이상고온이 계속된다. 내 몸은 먹고 자고 일어나서 걷는 일에 아주 효율적이리만치 적응을 잘해나간다. 신기할 정도다.

묘 하나를 더 지나니 바위지대가 나온다. 할미봉처럼 그리 험하지는 않다. 정상에 오르니 전망 좋은 곳이 있다. 한 눈에 삼도봉은 물론이고 지나온 길이 다 보인다. 전망 좋은 곳에 서면 왜 나는 자연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는 산을 통하여 나를 보는지 모른다. 갑자기 아름다운 풍경대신에 그 풍에 서 있는 초라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부끄러워진다. 내 모습이.

다시 험한 바위를 지나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걸으니 삼도봉이 나온다. 삼도봉에 올라서서 놀랐다. 산 정상에 커다란 돌덩이로 만든 거북이가 있다. 저거 만들려면 사람들 꽤나 고생했겠다는 생각과 산 풍경에, 자연의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한다. 사진도 찍고 싶지 않았지만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a 삼도봉 거북이 상

삼도봉 거북이 상 ⓒ 정성필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무지원 단독으로 걸었던 벡두대간 종주 이야기

덧붙이는 글 2004년 5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무지원 단독으로 걸었던 벡두대간 종주 이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