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하는 하종강 소장한울노동문제연구소
긴 호흡으로 역사 속을 거닐다
1980년대 초 인천에서 시작한 하 소장의 활동 내용과 반경은 이후 전국적으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따라서 하 소장만큼 각 방면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현장을 체험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는 피부로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사람이다. 노동현장에서 인권의 발전이 어느 정도인지 묻는 질문에 반색하며 답한다.
“아주 좋아졌지요. 노동자의 권리가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자본가와 대립구도에서 보면 여전히 사회적 약자이지요. 사회적 약자의 권리보호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비정상적인 나라입니다.”
그가 보고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다. 환경미화원들이 한달 넘게 파업 중인 데를 찾아가 보니 서른 명이 사용해 온 휴게실 겸 탈의실이란 게 고작 1.5평 컨테이너 박스 하나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압축 처리하는 그 작업장에 그 흔한 샤워 시설 하나 없었다.
지난해부터 청소담당 구역이 두 배로 늘어났는데도 경영진은 인력을 3분의 1로 줄였다. 밤새도록 일할 수밖에 없는데도 임금인상은 외면당하는 것이 현장의 현실이다. 제대로 노조를 꾸릴 힘조차 없는 이들의 딱한 사연은 하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무수히 깔려 있다.
어느 병원에서는 피 묻은 빨랫감을 처리하는 노동자들이 한 달 뼈빠지게 일하고 받는 액수가 50만원. 거기에서 5만원 더 올려 달라고 했다가 무더기로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의 농성장에도 하 소장의 잰걸음이 빠질 리 없다.
최근 노조비리 사건이 크게 터지면서 방송과 언론이 하 소장을 많이 찾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말을 아낀다.
“노동운동이 중대 전환기에 서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치열한 반성을 해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와 비교해 볼 때 노동 귀족은 아주 극소수일 뿐입니다. 지금 언론에 대고 노동운동을 공격한다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 현실에서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데 굉장히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있는 갈등의 깊은 골을 메우는 일 또한 그의 몫이다. 비정규직 사람들에게는 ‘정규직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정규직에게는 ‘비정규직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아느냐, 당신들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정상적인 시선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사실을 그는 굳게 믿는다.
“우리가 전두환 군사정권과 투쟁할 때, 그 싸움이 한 30년 혹은 50년 걸릴 줄 알았지요. 그런데 15년밖에 안 걸렸잖아요. 그 살벌한 시대에 이런 세월이 우리 앞에 그리 쉬이 오리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고통스러울 때는 역사를 긴 호흡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럼 마음이 좀 편해지지요. 전교조가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해 왔는지 보세요. 그리고 저 요즘 공무원 노조 만나느라 안 가 본 땅이 없어요. 휴전선 북쪽에서 남쪽 해남, 완도, 제주까지 다녀요.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공무원이 전국 방방곡곡에 노조를 만들 것이다, 시청 군청 읍면 동사무소까지 공무원 노조 깃발이 날릴 거라고 했다면 정신 나간 놈 취급받았을 겁니다. 우리 사회 변화의 방향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보면 굉장히 발전한 거죠.”
낭만주의자 하종강
그가 나직하고 듣기 좋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목소리나 어투 때문에 앞에 앉은 사람은 누구나 무장해제 당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거기다가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순하고 선한 눈빛이라니! 그런 눈에 또 자주 눈물이 맺힌다. 노동자의 손을 맞잡으며 목이 메는 그를 후배들은 낭만주의자라고 부른다. 때로 그의 강연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제가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택한 성향인지도 모르지요.”
사실 선택이라기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활동을 했지만 문학은 공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와야 진실하다고 믿어 대학은 일부러 물리학으로 선택했다. 평탄한 시대였다면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명의셨던 조부의 영향으로 의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지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바로 위의 선배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고통당하는 것을 봤는데, 어떻게 그 길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그가 삶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거창하지도 높지도 않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정도의 원칙만 지키고 살아도’ 인생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하 소장은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간다. 때로 멋들어진 장소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가 가는 현장은 험하고 낮은 곳이다. 교육장소라야 어디 폐교 운동장, 논두렁을 한참 가로질러 가야 있는 구멍 숭숭 뚫린 비닐하우스, 그 바닥에 앉아 있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그의 말을 원한다. 수십 년 노동을 바친 뒤에 겨우 자신이 노동자인 줄 깨달은 사람들을 찾아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또 걸어간다.
아! 그의 그 걸음이 바로 야간비행이 아닌가! 사막을 가로질러 밤하늘을 날았던 생 텍쥐페리가 그의 모습 위로 오버랩된다. 어둔 밤하늘에 녹색의 계기판과 별만 길잡이 삼아 떠났던 사람. 척박한 노동현장에 별을 뿌리는 하 소장의 외로운 야간비행도 오래오래 계속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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