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기 시집 <먹염바다>실천문학사
나는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눈으로 읽지 않는다. 소리로 읽는다. 낭송하지 않으면 어느 시인이 썼건 그 시가 좋은 시인지 그렇지 않은 시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만져본다. 시를 읽어나가는 동안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 감상법 이외에 더 이상의 감상 재주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침 여덟시 경에 <먹염바다>에 실린 시들을 낭송하며 감상을 웅얼거렸는데, 벽을 맞댄 옆집이건 방바닥과 천장을 맞댄 아랫집이건 그 소리가 스며들어서 시끄러웠을지 모르겠다. 맞은편 빌라로 바람 타고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엉성한 빌라촌(간판만 빌라지 건물과 건물 사이가 어른 한 사람 몸길이밖에 안 되는 다세대주택가)은 방음벽이 잘 안 되어 있기로 유명하다.
집집마다 서로서로, 다른 집 소리에 시달릴 만큼 다세대주택이 숨막힐 정도로 꽉꽉 들어찬, 엄청나게 잘못 개발한 환경개선지구. 간신히 내 집 마련했던 최초 입주자는 입주가의 60% 이하로 폭락한 시가에 한숨만 내쉬고, 세입자들은 폭락한 집값이 절대로 정상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반목(反目)의 동네.
그런데, 시를 읽어나갈수록 고개를 쳐드는 생각, "시인의 바다야말로 가난의 바다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네 엉터리 환경개선지구처럼 아웅다웅하지 않는다. 시인의 가난한 바다는 꾸준히 침묵하며 한(恨)을 삼키고 있다. 밤이면 수족관 산오징어도 가라앉아 잠들 듯이, 가난한 바다도 잠들고 있다.
바다에다 소주를 부으면 어떤 냄새가 날까?
그의 시는 바람 불지 않는 밤바다처럼 고요하다. 고요하지만 소주 냄새가 난다. 그 소주 냄새 속에서 섬 사람, 바다 사람 냄새가 난다. 그래도 역시 고요하다. 비가 내려도 고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맨 어깨에 빗물이 떨어지는 듯한, 슬픈 고요함이다. 서러움이다.
54편의 시 가운데 '연평도에서'에서 나는 가장 짙고 슬픈 바다 냄새를 맡았다. 6.25 한국전쟁, 그 한(恨)의 냄새다. 시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집 소개를 대신한다.
밤바다는 잠들었는가 이 밤에
엉겅퀴 개망초같이 풀어논 삶이 여기에 모였구나
고향이 지척인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갯골에서 잡아왔다는 병어에게도 나는
고향을 묻지 않았다
산허리 숭숭한 군용도로와 흙먼지 날리는 군용트럭과
초병의 감시 어린 총구가 밤바다 어딘가를 지향하고
밤새 부둣가에선 해병대원이 하역을 하는 유월의 밤에게도
나는 묻지 않았다
(중략)
북방한계선을 향해 고속정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밤에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밤에
선창가 소줏집에선 늙은 어부가
밤새 독한 소주를 물 푸듯 하는 밤에게도 나는
묻지 않았다 이 밤에
오오 모든 게 지척인 이 밤에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밤이 섧도록
흔적도 없이 울고 있는 유월의 밤바다에게도
나는 묻지 않았다
-<먹염바다> 74~75쪽 '연평도에서'
덧붙이는 글 | <먹염바다> 이세기 지음/2005년 6월 25일 실천문학사 펴냄/207×126mm 136쪽/책값 60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6부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2005년 12월 출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먹염바다
이세기 지음,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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