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리 마을에서 벌어진 칡넝쿨 줄다리기 장면.이규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잃어 버리고 산다. 우리의 것이 오히려 더 생소하고 낯선 것이 되어 익숙하지 못한 행동들이 앞서게 된다. 풍물 장단을 전파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그래도 나이 드신 분들은 기본적인 장단에 익숙하여 어설픈 보릿대춤이나마 실컷 추면서 흥에 겨워하지만 청소년들의 경우엔 현대 서양음악에만 길들여져 몸이 지극히 어색하기만 하다.
최근에 들어 와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방과후 특기적성 교육 등을 통해서 풍물이나 가야금 등 우리 것에 대한 교육들이 빈번해지고 있어 이러한 우려를 불식 시키고 있지만 일상적인 문화들의 주류엔 아직도 대중적인 소비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사라져 가는 마을의 전통놀이를 복원해 내고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실현해내기 위한 마을이 있어 주목된다.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으로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 여러 흔적들은 우리 농촌의 삶의 현장에 남아 있어 역시 시골이구나 하는 정서적 안정감과 삶의 밝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 동강리 마을은 담양읍에서 옥과 방향으로 가다가 거의 옥과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의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고인돌과 커다란 마을 표지석이 있어 마을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원로 어르신들에 의하면 고인돌에서 전에 돌칼을 발굴하여 마을에서 보관하다가 군문화원에 기증하였는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좀 더 안정적인 보관처를 찾아서 맡긴 것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결과가 되고 말아 지금도 아쉬움을 가득 안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백중(음력 7월 보름, 올해는 8월 19일)날 출향 향우들까지 함께 모여 대동계를 치른다. 그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는데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칡넝쿨 줄다리기'이다. 흔히 줄다리기 하면 정월 대보름날 한해를 시작하면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고 화합과 단결을 위한 마을 단위의 대축제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그러한 시기에 줄다리기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칠월백중 때 행해지는 것이었다. 칠월백중은 힘겨운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면서 마을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여름잔치의 하나이다.
한해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을 선발하여 장원으로 매기고 소에 태워서 축하해 주기도 하는 농사꾼의 날이 백중이다. 이런 날 아침부터 어른들은 역할을 나누어 한 팀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서 칡넝쿨을 베어 주면 아이들이 한주먹씩 안고서 끌고 내려와 동네 당산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어른들에게 전달해 준다.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전달된 칡넝쿨을 가지고 삼합으로 왼줄을 꼰다. 보통 100mm의 파이프 정도 굵기로 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산나무 한 가지에 걸쳐서 한켠에선 줄을 잡아당기고 한켠에선 계속하여 칡넝쿨을 공급해 가면서 왼쪽 방향으로 세 갈래의 칡넝쿨이 꼬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꼬아진 칡넝쿨로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줄다리기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홍보를 한다. 그런 다음 당산나무 앞의 넓은 터에 모여 고샅을 기준으로 편을 나누어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줄다리기를 하고 난 후 줄의 처리를 어떻게 하는가다. 흔히 보름날 줄다리기의 경우 줄을 한 토막씩 베어서 각자의 지붕 위에 던져 놓으면 집안에 복이 들어온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마을의 경우 줄다리기가 끝나면 곧장 당산나무에 줄을 매어 달아 그네를 만들어 어린이부터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굵은 칡넝쿨 그네는 이렇게 하여 거의 다음해가 될 때까지 아이들의 귀중한 놀이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하나하나의 염원이 이리저리 꼬이고 꼬여 만들어진 줄은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그 염원들이 전달되어 결국은 오랜 전통을 다시 복원하여 새로운 미래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줄다리기의 전통이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과 이농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되고 여러 여건이 변화되어 줄다리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매년 백중 때면 출향향우들까지 모두 모여 대동계를 치르면서 굳건한 화합의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그것도 계속되다가 경제적인 사정 등의 이유로 한해는 크게 행사를 하고 한해는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실내행사를 해 왔다고 한다.
현재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최병언씨는 마을에서 아주 젊은 측에 속한다. 46세가 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후배가 한둘 정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런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마을 청년회의 회의를 통해 '오래된 미래'를 다시 만들어가자는 결의를 다졌다.
마침 민속학을 전공하는 담양 출신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자문과 고증, 풍물을 지도하면서 담양농악의 선두일꾼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무정면 출신의 김종혁 등이 함께 결합하여 주민들을 성원하였다.
여기에 담양군 임업협동조합에서 칡넝쿨제거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칡넝쿨을 현장에서 바로 제공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칡넝쿨 줄을 만들면서 어른들로부터 옛 이야기를 듣고 기억을 더듬어 가르치는 대로 줄을 만들었다. 거기에 후렴구를 기억하고 계시는 김용기(75) 어른으로부터 줄을 매고 불렀던 소리를 배운다.
"위 아자 넘자.... 어화 ... 넘... 잘도 허네.. 잘도 허네... 위 아자 넘자 어화 넘... 우리 마을 힘을 합해... 위 아자 넘자 어화 넘……."
중모리부터 시작하여 자진 모리까지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 줄다리기 소리 속에 오래된 미래를 향하여 땀을 흘리고 있는 마을의 희망과 기쁨을 본다. 아이들도 마냥 좋아 칡넝쿨 그네를 타고 하늘높이 박차오른다.
지난 19일 내리는 빗줄기마저도 우리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흐리게 할 수는 없다. 한 여름 오히려 시원한 소나기에 모두가 웃고 즐기는 신명난 공동체 한마당은 이렇게 노인네뿐인 우리 농촌에 새로운 희망으로 커나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멀티채널을 꿈꾸는 인터넷 담양신문 "담양저널"(www.dyj.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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