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서 캐낸 보석같은 곳

파주 광탄면의 벽초지 문화수목원

등록 2005.08.24 00:43수정 2005.08.2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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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 1차선의 낯선 시골길을 달리는데 창 밖으로 계곡을 따라 텐트를 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아침 저녁이면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건만 아직도 물놀이를 즐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저 앞쪽으로 두 사람이 걷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 중 하나의 손에 작은 양동이가 들려 있다. 그 속에는 한 끼 정도 매운탕을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분량의 작은 물고기들이 들어 있다. 아마도 이 근처 어디선가 잡은 것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저 계곡 아래에서 어망을 들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서너 명이 한 패를 이루어 그물로 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불과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 그 여유로운 모습에 마치 도시에서 몇 시간을 달려온 것과 같은 착각을 느끼고 말았다.

벽초지 문화수목원은 그런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물고기가 뛰어 노는 맑은 물,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즐길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계곡, 그리고 비록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여름 햇살에 김빠진 사이다처럼 미지근하게 변하긴 했어도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공기. 그런 곳에 벽초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벽초지 수목원에 대한 첫 인상은 다소 의외였다. 마치 중세 영주의 성을 연상시키는 듯한 회색빛 벽돌로 만들어진 높은 담장. 주위의 자연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멋 없고 밋밋하게 늘어선 잿빛 담장을 보며 이곳이 과연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찾을만한 곳인가 하는 선입견이 들었다. 이왕 울타리가 필요했다면 수목원답게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소재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하필 음침한 회색빛 담장이라니….

하지만 매표소를 지나 수목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밖에서 느꼈던 회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밖에서 보는 폐쇄된 모습과는 달리 눈 앞이 확 트이는 것 같은 시원스러운 수목원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벽초지 수목원의 상징인 소나무
벽초지 수목원의 상징인 소나무양허용

제일 먼저 고개를 있는 대로 뒤로 꺾어야만 그 끝을 볼 수 있는 소나무 무리와 옹기종기 피어 있는 여름 꽃들이 우릴 맞아준다. 검은빛이 감도는 바위로 한껏 멋을 낸 둔덕을 올라서니 비비추며 옥잠화, 참나리 같은 들꽃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한다. 빨갛게 익은 뱀딸기 무더기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지 못한다. 검은 날개를 가진 잠자리와 보라빛을 띤 이름 모를 나비, 그리고 꿀을 따기 위해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자연이 베풀어주는 소리 없는 환영인사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서면 야생화 정원을 따라 산책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흰나비바늘꽃이나 애기산꼬리풀, 달빛코스모스, 상사화, 패랭이 같은 정겨우면서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들꽃들을 만날 수 있다. 한쪽에는 한 가족이 앉아 쉴만한 널찍한 정자가 있어 잠시 더위를 피해 갈 수 있다.

애기산꼬리풀
애기산꼬리풀양허용
그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수목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만날 수 있다. 짙게 우거진 나무 수풀 사이로 수목원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연못 ‘벽초지’의 모습이 보인다.


널찍한 연못 주변은 사진작가들의 입맛을 끌어당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우선 호수 입구에 긴 팔을 축축 늘어뜨리며 선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서니 주위가 어둑어둑할 정도이다. 아무리 강한 여름 뙤약볕이라도 이곳은 좀처럼 뚫고 들어오기 힘들 듯하다.

그 아래 잘 다듬어진 돌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풍경은 일품이다. 그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 한숨 즐기고 나면 원기가 충만할 것만 같다. ‘마음을 비우는 다리’라는 뜻을 가진 무심교(無心橋)가 이승과 극락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처럼 마음에 다가온다.

버드나무 그늘 사이로 바라보이는 벽초지
버드나무 그늘 사이로 바라보이는 벽초지양허용
잠시 짙은 나무그늘 아래 앉아 숨을 돌리다가 햇볕 한 줌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연못의 전경을 내다볼 수 있는 육각정자 파련정에 이르게 된다. 연못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연못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으면서도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버드나무에 감싸여 한 여름 더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연못 가장자리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좁다란 계단을 통해 연못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입구에서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시원스러운 폭포가 있다. 눈과 귀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산책로 1
산책로 1양허용
두 사람 정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는 나무 데크가 연못 중심까지 연결되어 있어 보다 가까이에서 연못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이미 때를 지난 것인지 아쉽게도 수련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간혹 한 두 송이 팔을 벌리고 때늦은 방문객을 맞는 연꽃들도 있다. 가시가 달린 것 같은 자그마한 꽃잎을 자랑하는 노랑어리연꽃의 애교에 마음을 빼앗길 것만 같다.

데크를 따라 연못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산만한 연잎 무리를 볼 수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니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은 극락으로 이르는 길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연잎을 우산 삼아 그 밑에 숨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의자 삼아 그 위에 앉아 있는 시늉을 내 보기도 한다. 한참 연꽃이 필 시기라면 이곳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연잎은 우산도 되고 의자도 되고...
연잎은 우산도 되고 의자도 되고...양허용

연못 맞은편에는 넓은 잔디광장이 있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좁은 집안에만 갇혀 있던 아이들은 이곳에서 웃고 뛰어 놀며 그 동안 구속되었던 시간들을 마음껏 풀어 던져 버린다. 드넓게 펼쳐진 짙은 초록의 아름다움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이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기 그지없다.

연못과 잔디밭이 만나는 그 곳에 작은 나룻배가 한 척 있다. 수목원에서는 그곳에 ‘천사의 문(Angel’s Gate)’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 놓았다. 아마도 밋밋한 풍경에 점을 찍듯 멋스러움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가져다 놓은 소품일 테지만 내게는 그 나룻배가 낭만적이기 보다는 왠지 쓸쓸함을 더해주는 것 같으니 내 가슴 속에 채우지 못한 허전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나룻배
나룻배양허용
이 수목원의 특징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산책로가 많다는 것이다. 같은 수목원 내의 길이지만 계절에 따라 그 분위기는 천차만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 아름다운 길과 가을에 아름다운 길, 그리고 또 봄, 겨울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다를 듯하다. 그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사계절 모두 일삼아 수목원에 찾아오고 싶어지는 길이다.

산책로 2
산책로 2양허용
그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다시 한 번 끝없이 넓게 펼쳐진 푸르른 잔디밭을 볼 수 있다. 도화지 하나 가득 초록색만 칠해 놓은 그림이 펼쳐지는 듯하다. 그 풍경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곳을 시원스럽게 달려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맨발로 걸었던 한택식물원의 잔디광장이 참으로 좋았건만 이곳 역시 그 이상으로 느낌이 좋다.

잔디광장 주위로는 잠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벤치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잔디광장 뿐 아니라 산책로 어디에서든 한 번 앉아서 쉬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벤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쁜 걸음으로 성큼성큼 왔다가 바람처럼 휙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이 좋은 풍경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기라며 배려해 놓은 듯하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광장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광장양허용
잔디광장은 수목원의 끝이다. 그곳까지 가면 수목원의 끝에 이른 것이다. 오는 길에는 갔던 길과 달리 숲 속에 난 작은 오솔길을 택해 걸어본다. 검은색 날개가 달린 잠자리들이 사방으로 바쁜 날개 짓을 하며 날아다닌다.

그 길 중간쯤에서 나무그늘에 숨어 있는 그네의자를 만났다. 그 옆으로는 작은 개울도 흐른다. 연인 한 쌍이 그곳에 앉아 키스를 나누다가 우리가 다가가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청춘이란 또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렇게 숨어서 나누는 키스는 또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길로 돌아서 갔을 것을…. 그 연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연인들이 비우고 간 그네의자에 앉은 첫째 아이가 동생에게 한 마디 한다.

“여기 앉아서 하늘을 봐봐.”

아이의 마음속에도 순간 시심(詩心)이 동했던 것일까?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누구라도 저 자리에 앉으면 간단한 시 한 구절쯤은 뇌리에 떠오를 듯한 풍경이다.

연인 같은 남매
연인 같은 남매양허용
아이들은 마치 연인이라도 된 듯 그네의자에 앉아 손을 맞잡고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눈다. 저 아이들도 언젠가는 제 짝을 만나 저런 모습으로 사랑을 속삭이고 또 아이를 낳아 오늘 나처럼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수목원을 찾겠지. 몇 십 년 후에 우연히 저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이 저 자리에 앉게 된다면 얼마나 세월의 무심함이 느껴질까. 하릴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흔들리는 그네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졸졸 흐르는 개울 소리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끔 일상에서 벗어나 이렇게 자연 속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벽초지(碧草池).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모르겠으나 기가 막힌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과 돌과 연못, 수목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 이름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으니 말이다.

벽초지 문화수목원은 ‘문화’라는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수목원 그 자체의 역할에서 벗어나 예술문화 전시회나 세미나, 음악회 등 문화예술의 공간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아직은 정식으로 개원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건물은 아직 공사 중이고 매점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완벽한 준비가 되기까지는 며칠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벽초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벽초지양허용
늘 가까이에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수목원이나 식물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건만 집에서 멀지 않은 이 곳에서 세 시간 가까이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수목원 전체의 조경이 사람의 손을 너무 많이 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아 아름답다면 마음도 즐거워질 수 있는 법이겠지만 보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손을 빌어 공들여 만든 아름다움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화려하지는 않으나 수수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에 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렇게 좋은 공간에 지나치게 폐쇄적인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수목원 내부를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는 크고 칙칙한 회색빛 담장, 그리고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음에도 삼각대조차 지참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수목원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관리의 편의를 위한 것이 더 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벽초지 수목원에서의 느낌은 좋기만 하다. 마치 진흙 속에서 보석 하나를 주워 든 기분이다.

덧붙이는 글 | 벽초지 문화수목원은 현재 개원 준비 중이며 정식 개원일은 9월 9일입니다. 

(관람요금) 성인 6,000원, 어린이 4,000원

(찾아가는 길)

(서울이나 일산) 통일로에서 의정부 방면 39번 도로를 이용 → 고양동 방면으로 좌회전 → 3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보광사, 송추 CC 방면으로 진행 → 송추 CC를 지나 직진 후 방축 사거리에서 서원밸리 CC 방향으로 우회전 → 수목원
(의정부) 주내검문소 → 양주시청삼거리 → 가납리 사거리 → 대성아파트368국도 → 발랑저수지 → 수목원

(관람시간) 09:00 - 19:00

(관련 홈페이지) http://www.BCJ.co.kr

덧붙이는 글 벽초지 문화수목원은 현재 개원 준비 중이며 정식 개원일은 9월 9일입니다. 

(관람요금) 성인 6,000원, 어린이 4,000원

(찾아가는 길)

(서울이나 일산) 통일로에서 의정부 방면 39번 도로를 이용 → 고양동 방면으로 좌회전 → 315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보광사, 송추 CC 방면으로 진행 → 송추 CC를 지나 직진 후 방축 사거리에서 서원밸리 CC 방향으로 우회전 → 수목원
(의정부) 주내검문소 → 양주시청삼거리 → 가납리 사거리 → 대성아파트368국도 → 발랑저수지 → 수목원

(관람시간) 09:00 - 19:00

(관련 홈페이지) http://www.BC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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