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청소라도 해주고 가야 하는데"

아들 얼굴 보는 것이 어머니의 즐거움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등록 2005.08.23 23:16수정 2005.08.2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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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내가 올라간다고만 하면 오지 말라고 난리냐?"
"아 거, 반찬도 있고 밥도 있다니깐 왜 자꾸 올라온다고 그러세요."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임기창
저는 자취생입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취생활을 시작했죠. 해 본 사람들은 알지만, 자취생활이란 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웬만큼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한다면 몸 망치는 데 이보다 빠른 길이 없죠.

게다가 학교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 외 동아리 활동이다 뭐다 해서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자기 방에 자연스레 무관심하게 됩니다. '자취방'하면 방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퀴퀴한 냄새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유학 보낸 부모들은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집이 그나마 가까운 분들은 반찬거리를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오셔서 부려 놓고 가시지만, 그렇게조차 하기 힘든 부모들은 택배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택배를 열어보면 '내가 지금 군대에서 부식 공수 받나'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자취생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마찬가지고요. 문제는 어머니께서 올라오시는 걸 제가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올라가겠다'고 전화를 주시는 날이면 항상 위와 같은 말싸움이 벌어집니다. 물론 번번이 제가 무릎을 꿇긴 하지만요.

어머니 앞에서 자존심이 웬 말?


사실 제가 생활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하거나, 아니면 딱히 숨길만한 짓을 하고 다녀서 어머니를 못 올라오시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러냐고요?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자존심 같은 겁니다. 등록금 대 주시고, 자취방 보증금까지 마련해 주셨으면 됐지, 더 이상 부모님께서 저에게 신경을 쓰시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참 쓸데없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장남이라 그런지 이런 쪽에 이상하리만치 오기가 생기는 걸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자취생활 초반엔 그럭저럭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군대에서 1년 정도 취사당번을 맡은 적도 있어서, 재료만 있으면 웬만한 음식은 만들어 먹을 줄도 압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 바빠지기만 하고, 식사나 청소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는 점점 없어진다는 겁니다. 정말 이따금씩 서울에 올라오시던 어머니께서는 결국 마음을 놓지 못하시고, 언제부터인가 꽤 자주 상경하시게 됐습니다.

책이며 옷가지가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방과, 아예 채소밭이 되어버린 냉장고 속을 보여드리는 게 저로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저는 혼자서도 꿋꿋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그런데 어머니 마음은 그게 아닌가 봅니다. 말로는 '청소 좀 하고 살아라'며 핀잔을 주시면서도, 아들을 위해 뭔가 해 줄 일이 있다는 게 기쁘신 모양입니다. 저는 아직 그 마음을 완전히 이해 못 하고 있습니다. 아마 훗날 제게도 자식이 생겨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지요.

어느 겨울날의 기억

지난 겨울, 저는 방학이라 종로의 어느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올라오시겠다는 전화를 하셨습니다. 서울 친척집에 볼 일이 있는데, 겸사겸사 오시겠다고요.

제가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 어머니께서 올라오시는 날이면 항상 열쇠를 집 밖 어딘가에 숨겨두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정신이 없었는지, 열쇠를 그냥 들고 가버린 겁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기억이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그냥 가시라고, 다음에 오시라고 말이죠. 어머니께서는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무실이 꽤 멀었기에 제가 극구 말리자, 싸들고 오신 것들을 문 앞에 부려 놓고 가시겠답니다. 저는 혹시 창문이 열려 있을지 모르니 확인해 보시라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죠.

한참이 지나 어머니께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창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냥 문 앞에 놔두고 가신다고요. 제가 열쇠를 두고 갔으면 되었을 것을.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려는데, 어머니의 한 마디가 제 가슴을 찌릅니다.

"내가 방이랑 냉장고 청소라도 해주고 가야 되는 건데…."

오히려 저보다 더 미안해 하시는 목소리에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당신이 미안해 하셔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신경을 안 쓴 건 저인데 말이죠.

그 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문 앞에 놓여진 것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봤습니다. 창문이 '스르륵'하며 열리는 소리에 제 콧잔등이 시큰해졌습니다. 그걸 못 찾으시고. 아들이 사는 방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싸들고 온 음식들을 문 앞에 두고 가셔야 했던 어머니의 아쉬운 표정이 눈에 선했습니다.

어머니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어머니께서 올라오시는 걸 조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어머니는 제게 뭔가를 기대하며 올라오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아들을 위해 음식을 싸들고 오시는 것, 지저분한 방과 부엌을 청소해 주시는 것, 그 모든 것을 당신은 즐거움으로 여기신다는 걸. 아주 조금이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 듯도 합니다.

어제 또 어머니께서 올라오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와 단 둘이 마주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좋은 음식도 많이 얻어먹긴 하지만, 그 어느 음식을 어머니의 밥상과 비교할까요. 그 누가 제 입맛을 이렇게 꼭 맞출 수 있을까요.

어머니를 배웅해드리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께는 '대가'라는 것을 드릴 생각을 말아야겠다고. 당신께서 바라지도 않으시거니와, 도저히 드릴 수도 없겠다고 말이죠.

당신께서 즐거움으로 주시는 것, 저 역시 즐거움으로 받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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