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세월은 천천히 갔으면 좋겠습니다

고추가 다 죽어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 하십니다

등록 2005.08.25 18:41수정 2005.08.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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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시골에 가서 딸 때까지만 해도 고추는 여름 햇살을 받아 붉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밭이 꽤 넓기 때문에 고추 따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힘든 것보다는 가지마다 열린 고추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흐뭇해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다섯 가마니나 땄다고 하시면서, 마당에도 널고, 길가에도 널고, 비닐하우스에도 널고, 그래도 고추가 남아 아랫방, 건넛방에 불을 지피면서까지 고추를 말리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동네에 있는 건조기에 말리면 하루면 말릴 텐데 뭐하러 고생을 하시냐고 했지만 기계로 말리면 고추 맛이 안난다면서 애써 수고스러움을 자청하셨습니다.

고추 농사가 잘 되어서 제일 흥이 나신 건 어머니이십니다. 논농사에서 나온 돈은 아버지 몫이지만 고추같은 밭농사의 경우에는 모두 어머니 차지이니, 특별히 목돈을 만져 볼 기회가 없는 어머니로서는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당신 마음대로 써도 될 비자금이 생기니 그냥 그 자체로 기분이 좋으신 겁니다.

어머니는 올해 고추 농사가 유난히 풍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번 만큼씩만 따면 우리 식구 먹을 거 빼고도 돈 될 고추가 많겠다면서, 그 돈으로 손자손녀 용돈도 주고, 제가 제일 고생했다면서 저도 돈 만원이라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형하고 누나들은 한번도 고추를 따지 않았으니 저만 준다고 하시면서요.

그렇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셨던 어머니였는데, 그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아마 지금쯤 어머니는 참 많이도 속상하실 겁니다. 이미 말리고 있는 고추를 보시면서 그 생각이 더 많이 드실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도 무거워집니다.

a 아버지는 식구들 먹을 만큼은 땄으니 괜찮다고 하시지만 당신 손으로 고추를 뽑아버리셨으니, 두고두고 가슴에 아픔으로 자리하지 않을 까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는 식구들 먹을 만큼은 땄으니 괜찮다고 하시지만 당신 손으로 고추를 뽑아버리셨으니, 두고두고 가슴에 아픔으로 자리하지 않을 까 걱정이 됩니다. ⓒ 장희용

아직 고추를 세 번 정도는 더 딸 수 있으련만 엊그제 아버지께서 고추를 뽑아버리셨다고 합니다. 계속 비가 와서 혹시나 하면서 전화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추가 다 썩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병까지 나서 고추가 다 죽었답니다.


요즘처럼 비가 계속 오면 고추가 물컹물컹해지면서 썩는 것을 예전에도 많이 봤는데, 아마 그렇게 썩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병이 났다는데 탄저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추 농사에서 탄저병은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한 번 퍼지면 고추밭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 손을 쓸 겨를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추농사에서 고추가 썩는다든지 탄저병에 걸리는 것은 해마다 크고 작게 겪은 일인지라 예전 같으면 속상해서도 그 마음 접으시고 썩은 고추지만 전부 따 말린 후 일일이 가위로 썩은 부위를 잘라내 그런 대로 양념으로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추를 뽑아버리셨다니, 생전 처음 있는 일에 고추도 고추지만 혹시 다른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섭니다. 아버지께서는 썩기도 했고, 병까지 생겨 많이 죽어서 그랬다면서 담담히 말씀하시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합니다. "속상하다"는 말, 그 말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픔이 있으련만 자식된 도리로 그 아픔 하나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 자식은 평생을 살아도 부모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나 봅니다.

a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아마 어머니 마음이 더 속상하실 겁니다. 고추가 풍년이라고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아마 어머니 마음이 더 속상하실 겁니다. 고추가 풍년이라고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 장희용

그러고 보니 2년 전의 일도 생각이 나네요. 2년 전에 논 하나를 판 적이 있는데, 연세도 드시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덩그러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이래저래 농사짓기가 불편했던 논을 정리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논을 지나치실 때마다 "어휴, 저 논 농사 안 지으니까 일이 갑절은 줄어 속시원하다고, 잘 팔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진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 논 팔아도 아직 세 마지기가 남았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말씀을 더듬어 보면 800평짜리 논에서 남는 돈이라고 해봤자 뭐 빼고 뭐 빼고 하면 150만 원이나 될까 말까 했는데, 남는 것도 없는데 1년 내내 힘들게 고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논 판 돈 은행이자가 많다면서 팔아버린 게 잘 한 거라고 맞장구를 치고는 했으니까요.

그런데요. 그건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걸 한참을 지나서 알았습니다. 평소에는 그 논 옆을 지나칠 일이 있을 때 논에 눈길을 주지 않는 어머니였는데, 그 날만큼은 잠깐이었지만 어머니는 분명히 그 논을 물끄러미 바라보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어렵게 살던 시절에 가난이 싫어서, 내 자식한테는 밥 굶은 서러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밤을 낮 삼아 일하셔서 마련한 논이라고 들었습니다.그렇게 하나씩 장만해서 자식들 키웠다고 들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난날 피와 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논인데 이제 남의 땅이 되어 버렸으니 그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잘 팔았다고 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다르게 육신도 마음도 약해지시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가슴이 시린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저부터도 그리 말했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냥 고추 하나가 죽은 것이라 하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는 자식과 같은 존재이니 그 속상함에 천천히 가도 될 세월, 훌쩍 건너뛰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에게서 저만치 달아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니 그냥 왠지 서글픔에 눈시울이 붉어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월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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