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촌 마을에서 여름과 작별하다

부산 청사포에서 보낸 한여름 밤의 꿈

등록 2005.08.30 00:08수정 2005.08.3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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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5년 8월 28일.

2005년 8월 28일. ⓒ 민은실

기러기가 땅 위에 앉는 모습을 낙안이라고 한다. 그 풍경을 선율로 그려낸 곡이 <낙안의 왈츠>인데 청사포 방파제를 걷노라니 그 곡이 입 안을 맴돈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흥얼거리던 왈츠곡이 상쇄되는데도 좋다.

해운대에서 달맞이 고개를 지나면서 차창 밖을 보던 중 작은 어촌 마을이 보였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차를 돌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내려왔다. 낮은 돌담에 파란색 철문은 낡았지만 어촌의 짭조름한 냄새와 함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내 청사포 방파제와 맞닿는다. 20분 남짓이면 바다를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규모이다.


닻을 댄 파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이끼가 낀 돌들이 밀물을 기다리고 있다. 방파제 초입에선 멍게와 해삼과 조개를 파는 아낙네들이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먹어 보이소. 청사포에 왔으면 한번 먹어 봐야제."
구수한 사투리로 호객 행위 하는 아주머니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난 시각이라 해가 지기 전에 바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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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8일. ⓒ 민은실

해안로를 따라 걸으며 석양이 지는 청사포를 바라보았다. 바다 저만치 작고 아담한 등대가 고요하게 서있었다. 고즈넉한 저녁과 조촐한 청사포와 잘 어울리는 등대였다. 저녁이 되면서 파도가 거세지니 힘없는 등대가 금세 바닷물에 휩쓸리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좀 더 가까이 가보자. 마음 같아서는 발이라도 담그고 물장난이라도 치고 싶지만 쌀쌀한 날씨에, 저녁 무렵은 위험하겠다 싶어 손이라도 담가 보자는 마음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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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8일. ⓒ 민은실

낮은 바위들은 초록색 이끼가 잔뜩 껴서 원시적인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미끄러질 만큼 매끄러운 이끼들이 돌 위에 크레파스로 색칠해 놓은 것처럼 진한 초록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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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8일. ⓒ 민은실

바위 틈 사이로 고여 있는 바닷물은 곧 해가 지고 나면 밀물에 쓸려 저만치 밀려갈 것이다. 그 틈에 있는 불가사리들도 밀려갈 것이다. 조용히 숨죽인 듯 누워 있는 불가사리들 중 이미 죽은 것도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선명한 색과 통통한 살이 붙어 있는 걸 봐서 몇 개는 생명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됐다. 귀가 멍멍해질 만큼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듣고 찬 바닷물에 손도 담그고, 불가사리도 확인했으니 시장한 배 좀 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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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8일. ⓒ 민은실

초입에서 잡아끌었던 아주머니께 가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개불을 비롯해 해삼, 멍게, 조개, 회 감들이 바구니에 가득 담아 있었다. "신선한 거 한 마리 잡숴?"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 한 잔에 조개구이를 먹으니 살 것 같다. 사는 게 별거겠는가.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벗 삼아,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 술 한 잔 기울이는 게 낙(樂)인 거지. 제법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한 여름 밤의 꿈을 청사포에서 보내게 된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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