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궤도차

페터 헤르틀링의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등록 2005.09.07 22:10수정 2005.09.0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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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표지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표지소년한길
전쟁 속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한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남아 있다. 그러나 모든 행위엔 대가가 치러지기 마련이다. 타인이 베푸는 것은 그것이 자선이라 할지라도 상응하는 보답이 있기 마련이다. 소년은 기차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새긴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은 혹독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남편이 죽었다는 비보 듣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성한 어머니마저 세상을 버린다. 졸지에 고아가 된 베른트는 이모에게 맡겨진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인인 이모와 베른트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다.


베른트와 이모는 빈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한달 가량 '라'에 머물게 된다. 오랜 시간 기차를 기다리는 일은 모두에게 지루한 일이지만 13세 소년에겐 더욱 그랬다. 라는 소련군이 점령한 도시이고 곳곳에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이모는 도도해 보이지만 삶의 연륜만큼 현실과 타협할 줄 안다. 자기 편의를 위해 뻔뻔스러울 줄도 안다. 낯선 곳에서 자신과 조카가 살아가기 위해 저지르는 사소한 부정 행위엔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모는 타인이 베푼 것은 자선이라 할지라도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획된 자선을 위선이라 욕하기보다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이모는 자신이 손해 보지 않으려고 적정한 계산을 할 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처럼 행동한다. 어른들에겐 사소한 부정 행위는 일상 생활이다. 마이어씨와 같이 거래가 큰 부정 행위를 할 경우에만 범죄이고 경계의 대상인 것이다.

마이어씨는 조그만 시골 마을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몸에 잘 맞는 검정 양복과 반짝반짝 빛나는 검정 구두, 기름을 발라 넘긴 검정 머리의 마이어씨는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베른트과 이모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의 친절엔 대가가 따른다고 경고한다. 마이어씨는 국경을 넘나들기도 하고 소련군 장교와도 친분이 있는 암거래상이다. 덕분에 베른트를 위험한 지경에서 두 번이나 구출해 준다. 그러나 마이어씨의 도움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베른트에게 마이어씨는 궤도차를 타고 여행할 것을 제안한다. 베른트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마이어씨가 운전하는 궤도차에 오른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멋지고 신나는 여행이었다. 아이들은 스릴 넘치는 궤도차를 잊을 수 없어 두 번째 여행길을 떠난다. 너무 멀리 가버린 아이들은 소련군의 총격을 받고 놀라 돌아온다. 베른트는 이젠 더 이상 궤도차를 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이어씨의 뜻밖에 방문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몇 시간 동안 바람 속을 질주하여 달리던 궤도차는 국경에 닿아서야 멈췄다. 마이어씨는 베른트에게 주어진 임무를 맡기듯 국경 넘어 움막에 편지를 전하라고 한다. 베른트는 이모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움막에 있는 사람은 마이어의 적이었다. 상대방이 편지를 꺼내 읽자 베른트 뒤를 쫓으며 총격을 가한다. 궤도차는 달리고 베른트도 나란히 달린다. 간신히 궤도차에 오르지만 총격은 계속된다.


'베른트는 진행 방향을 보고 앉았다. 선로와 침목이 빠른 속도로 다가와 궤도차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궤도차에게 잡아먹히는 모습 같았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궤도차처럼 마이어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사지에 몰아 넣었다. 그 동안 그가 베푼 친절은 베른트를 이용하려는 사전 작업이었다. 트뤼브너 부인이 음식을 나누어 주는 자선 사업에 이모가 금덩이를 지불했듯, 베른트는 궤도차를 타고 달린 희열에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베른트는 이모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밝지 못했다. 코 앞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줄 알았다면 베른트는 궤도차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베른트는 자신처럼 어린아이들까지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마이어에게 분노를 느낀다.

"어른들이 우리를 그냥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 모든 어른들이 말이야"

베른트은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마이어같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언가와 전쟁을 치르듯 위험한 고지를 넘나든다. 그들이 전쟁으로 인해 받게될 아이들의 고통 따윈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운 전쟁터에서도 거리낌없이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마이어 역시, 대가를 지불하듯 싸늘한 시체로 베른트 앞에 나타났다. 밑창에 돈이 가득든 반짝이는 구두도 없이 등뒤에 구멍이 뚫린 채로 엎어져 있었다. 그 사건은 베른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된다.

이 책에선 어떤 일이든 대가가 치러진다는 것을 주지 시키고 있다. 아직 어리다 할 지라도 스스로 결정해 행동하는 일엔 그 결과를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가족이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가꾸어지는 것이 육신이다. 살아가는 동안 건강한 육신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큰 힘이 된다. 자신의 육신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유혹에 빠져 몸과 마음이 병드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페터의 소설에는 문학작품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사건의 정황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핵심을 잃지 않고 짜여진 플롯은 리듬을 타고 강약을 조절해 간다. 페터는 1976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받았고 2001년엔 독일 청소년 문학상 특별상을 받은 바 있다. 청소년에게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소설로, 페터 헤르틀링의 작품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페터 헤르틀링 글, 오승민 그림 / 문성원 옮김 / 소년한길, 2004

리더스 가이드, 알라딘에 올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페터 헤르틀링 글, 오승민 그림 / 문성원 옮김 / 소년한길, 2004

리더스 가이드, 알라딘에 올렸습니다.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페터 헤르틀링 지음, 오승민 그림, 문성원 옮김,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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