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한 알만 주세요, 네~"

밤 주으러 갔다가 고향 같은 곳을 발견했습니다

등록 2005.09.12 10:00수정 2005.09.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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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요즘은 이런 돌담을 구경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요즘은 이런 돌담을 구경하기 힘들어졌습니다. ⓒ 전향화

지난 10일 직장에서 밤줍기 행사를 가졌습니다. 행사장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였습니다. 아름드리 밤나무 아래서 밤을 주울 것으로 예상하고 둘째 아이와 가볍게 찾았는데, 뜻하지 않게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 밤줍기 행사장까지는 1.5km를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아이와 천천히 동네를 오르며 보니 전형적인 시골 모습을 아직까지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a 흙벽을 타고 오른 나팔꽃.

흙벽을 타고 오른 나팔꽃. ⓒ 전향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던 탓인지,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것들은 보면 점점 더 반가워지고 흥분하게 됩니다. 마을 길을 따라 흐르는 조그만 시내와 아직도 돌담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나 싶게 돌담과 흙벽, 기와집, 다랭이논….

저는 이런 것에 감탄합니다. 젊을 때는 무관심하던 이런 시골스러움과 자연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도시에 나서 도시에서 자란 아이는 그냥 재미있어 하는 듯합니다.

은행나무는 알사탕 같이 생긴 은행을 빼곡히 가지에 달고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는 은행들이 나뒹굴고…. 사진을 찍으며 재밌어 하는 우리 모습이 궁금한지 짖지도 않고 흰둥이가 우리를 바라 봅니다. 분명 이름이 흰둥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덕구('도그(dog)'의 변형된 이름), 아니면 워리(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워리가 하나씩은 꼭 있었던 것 같습니다)

a 우리가 하는 모습을 짓지도 않고 몰래 훔쳐보는 흰둥이.

우리가 하는 모습을 짓지도 않고 몰래 훔쳐보는 흰둥이. ⓒ 전향화

우리를 반기는 것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길을 가던 아주머니만이 아닙니다(아직도 냇가에서 빨래를 하시는 건지 비누곽과 빨래 바구니를 들고 가시며 웬일로 왔냐고 하십니다).

"음메~~" 목청을 길게 뽑은 것은 외양간의 송아지입니다. 요즘 시골을 다니다 보면 옛날처럼 소를 한두 마리 외양간에 키우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신식 축사에 한우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이 흔하지 이런 누렁이가 눈을 꺼먹대며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보기 드문 진귀한 모습입니다. 사진기를 들여대니 이녀석 고개를 내밀며 포즈를 취해줍니다. 찍혀 봤네벼.

a 카메라를 들이대니 고개를 내밀어 포즈를 취해 주는 누렁이.

카메라를 들이대니 고개를 내밀어 포즈를 취해 주는 누렁이. ⓒ 전향화

별 흥분할 일도 아닌 듯한데 저는 20년 전의 시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이 너무나 신기해서, 마치 제가 제 아이의 나이가 되어 고향에 온 듯한 생각이 들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아침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나팔꽃들이 쨍쨍한 모습으로 반겨줍니다. 아이는 나팔도 불어 보고 마귀할범 모자 같이 생겼다며 좋아합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들도 그 흔하게 보이던 나팔꽃, 봉숭아, 백일홍 이런 것들입니다.

a 마녀할멈 모자처럼 생긴 나팔꽃을 불어봅니다.

마녀할멈 모자처럼 생긴 나팔꽃을 불어봅니다. ⓒ 전향화

동네를 오르다 보니 담안으로 살짝 들여다 보이는 뒤곁의 장독대도 보입니다. 된장을 뜨러 나오신 어머니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a 뒤곁에 정갈히 놓인 장독, 된장 푸러 나오신 어머니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뒤곁에 정갈히 놓인 장독, 된장 푸러 나오신 어머니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 전향화

내 안에 내재해 있는 촌에 대한 향수는 나이가 들수록 숨길 수 없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걸 보면.

a 배추밭 가운데 화장실, 거름 걱정은 안 하시겠네요.

배추밭 가운데 화장실, 거름 걱정은 안 하시겠네요. ⓒ 전향화

a 상수리 나무엔 도토리가 여물고 있습니다. 다람쥐 식량에 눈독 들이지 마세요.

상수리 나무엔 도토리가 여물고 있습니다. 다람쥐 식량에 눈독 들이지 마세요. ⓒ 전향화

a 오이냐구요? 수세미입니다.

오이냐구요? 수세미입니다. ⓒ 전향화

산을 오르며 상수리 나무의 도토리도 보고, 자벌레도 보고 도마뱀도 보며 오르니 남들은 밤을 주워서 내려오는 시간에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기운 다 빼고 간신히 도착해서 밤을 주우려니 돌비탈밭을 뒤지며 밤을 주울 수가 없어 아이와 나무가지에 달린 익지도 않은 밤송이를 까서 떫은 속껍질을 퉤퉤거리며 벗겨 오도독 거리며 생밤을 두어 개 먹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목에 서서 구걸(?)을 했습니다. 밤을 못 줍겠다고, 불쌍하게 생각한 팀장님이 자기것을 나눠 주셔서 2kg에 4000원을 내고 산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a 기운이 다 빠져서 밤을 주울 수가 없어 구걸을 해야 했지만 이로 까서 먹은 햇밤맛은 좋았습니다.

기운이 다 빠져서 밤을 주울 수가 없어 구걸을 해야 했지만 이로 까서 먹은 햇밤맛은 좋았습니다. ⓒ 전향화

아마 제 아이의 내면에도 이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생기겠지요?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았지만 엄마와 손잡고 재밌게 구경하던 이런 모습을…. 그리고 제 나이가 되면 촌스러움 때문에 흥분하겠지요?

오늘 꼭 엄마가 계신 곳을 다녀온 것처럼 흐뭇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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