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정말 속상하다

빨래줄의 빨래를 걷어 다시 세탁기에 넣었다

등록 2005.09.23 17:19수정 2005.09.2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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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 뒷마당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과 과수원이 있다. 멀리 눈을 돌리지 않아도 계절 따라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담장 너머로 잠깐 잠깐 보면서 계절 가는 것을 알게 해주는 고마운 과수원이다.


그 동안은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 과수원 농사를 지으셨는데, 몇 년 전에 할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는 할머니 없이 할아버지 혼자서는 맥이 빠져서 농사를 못 지으시겠다면서 올해부터는 젊은 사람들에게 빌려주셨다.

그래서 올해부터 젊은 사람들이 사과 농사를 짓는데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꾸 문제가 생긴다. 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실 때는 농약을 많이 하지 않으셔서 그런 일을 모르고 살았는데,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농약 치는 횟수가 늘어났는지 뒷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에 농약이 묻어 빨래를 다시 하는 일이 벌써 서너 번째다.

보건진료원은 보건진료소에서 생활하다보니 진료소 안에서 밥도 해 먹고, 빨래도 하고, 잠도 잔다. 다른 직장인들은 아침 일찍 빨래를 널어놨다가 저녁에 퇴근해서 걷어 들이지만, 보건진료원은 아침 일찍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진료소 뒷마당에 빨래를 널어 두었다가 저녁에 걷어 들인다. 그래서 진료소에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햇볕 잘 드는 뒷마당이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유난히 비가 잦았던 올 여름 장마철을 지나면서 햇빛이 반짝하는 날이면 그 동안 못해두었던 빨래를 하곤 했다. 그런데 빨래하기 좋게 햇빛이 반짝하는 날이면 농사짓는 사람들 역시 농약치기 좋은 날이다.

처음엔 열려진 창문 사이로 '쏴~ '하는 소리가 들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더니 담장 밖 과수원에서 쏘아올린 농약이 담장 안에 널어 둔 빨래 위에 하얗게 내려앉는 게 보였다. 깜짝 놀라 뛰어갔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 잠깐 사이에 농약은 벌써 옷 위에 하얗게 이슬비처럼 내려 있었다.


빨래를 다시 해야겠다 싶어 하얗게 농약이 뿌려진 옷을 걷어 세탁기에 다시 집어넣고 과수원으로 갔다. 농약 치는 아저씨에게 뒷마당에 빨래 널어놓을 때가 있으니까 농약 하실 때 뒷마당 한 번씩 봐주시고 혹시 빨래가 있으면 농약 친다고 얘기 좀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 뒤에도 같은 부탁을 한 번 더 드렸지만 그 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고, 함께 농약을 치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같은 부탁을 했다. 그런데 그런 반복되는 부탁도 소용없이 오늘 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침 일찍 널어둔 빨래가 거의 말라갈 무렵 열려진 창문 사이로 '쏴~' 소리가 들려 혹시나 싶어 뛰어나갔더니 농약은 이미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났다.


빨래를 걷어 다시 세탁기에 집어 던지고 과수원을 또 찾아갔다. 농약 칠 때 빨래가 널려있는지 아닌지 한번만 봐달라고 지난번에 부탁하지 않았느냐고, 농약이 뒷마당으로 날아들어 다 말라가던 빨래를 다시하게 되었다고 얘기하면서 다음에 농약 칠 때는 꼭 얘기해 달라고 또 부탁을 했다.

내가 좀 억울하더라도 주민들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은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얼마쯤은 짜증이 묻어났을 것이다. 조금 귀찮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오늘처럼 이웃의 피해를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 때는 정말 화가 난다. 좀 귀찮고 번거로워도 농약을 치기 전에 담장 너머에 빨래가 널려 있는지 아닌지 한번쯤 살펴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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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하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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