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71회

등록 2005.09.26 07:59수정 2005.09.2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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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7 장 운대공자(雲大公子)

조국명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 역시 조그만 화선인 것 같았는데 운대공자가 있다는 별화선으로 다가가면서 꺼림칙한 기운을 감지한 터였다. 별화선 주위에도 여전히 화선들이 많이 떠 있었으나, 당연히 들려야 할 기녀들의 교성과 은밀한 속삭임 같은 것이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오히려 긴장감마저 감도는 듯했다.


'운대공자란 사람… 믿을 만한 인물인가?'

조국명이 풍철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막상 자네가 그렇게 물으니 딱히 대답하기 어렵군.'

조국명의 전음에 우려가 섞여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사귄지 십년이 넘었네. 하지만 그를 만나지 않은지 벌써 사년이 넘었네.'


풍철한의 말은 예전에는 그를 믿을 수 있었으나 보지 못한지 사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간사하여 예전에 아무리 친했던 친구라도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는 법이다.

'단순히 부호의 자제인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지. 시서(詩書)에 능하고 무공도 제법 틀을 갖춘 사람이라네.'

'왠지 느낌이 안 좋군.'

조국명은 노질을 하는 사공을 보고 있었는데 사공은 호리호리한 체격임에도 힘이 넘쳐 보였다. 능숙하게 한번 저을 때마다 배가 미끄러지듯 물위를 나아갔다. 만약을 위해 이미 조치는 해 놓았지만 어떠한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네.'

그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눌 동안 그들은 어느새 별화선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다른 것보다 조금 크고 화려한 배려니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크기와 화려함에 있어 다른 화선들은 견줄 바가 못 되었다.

그들이 탄 배가 별화선의 중앙으로 다가가자 갑판 위에서 나무로 만든 계단 같은 선구(船具)가 내려졌다.

"풍대협… 어서 오르십시오."

신시란 청년은 선구를 잡아 고정시키면서 올라가기 쉽게 했다. 풍철한은 거침없이 선구를 밟고 올라섰지만 조국명은 내심 불안했다. 만약 올라가는 도중 누군가가 손을 쓴다면 꼼짝없이 물에 빠질 터였다. 하지만 갑판에 오를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갑판에 오르자마자 그들을 반기는 것은 두 명의 여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스무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늘씬하고 성숙한 자태가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은연 중 여인의 체취를 느끼게 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한데도 그녀들은 옆이 길게 갈라진 남방풍의 화복을 걸치고 있어 바람에 날릴 때면 가끔 그녀들의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호위하는 자들로 보이는 장한들이 곳곳에 서 있어 그리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양쪽으로 갈라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손님을 모시는 태도는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어 그저 하루 밤을 즐기려고 데려온 기녀들 같지는 않았다. 그녀들이 안내한 곳은 아주 고아하게 꾸며진 넓은 선실이었다.

사방에 유등(油燈)을 밝혀 놓아 선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했다. 풍철한과 조국명은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음식 내음을 먼저 맡았다. 그곳에는 일곱 명의 남녀가 어울려 있었는데, 안에 있던 여자들도 한결같이 그 두 사람을 안내한 여자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빙 둘러 앉은 탁자 위에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서 오시오. 풍형. 그 간 별래무양(別來無恙) 하셨소?"

상석에 앉아 있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고급스럽게 장식된 문사건을 쓰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삼십대 후반 정도로 풍철한에게 깍듯이 포권을 취해보였다.

"내가 괜찮아 보이는가?"

풍철한 역시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어찌 들으면 무례한 것이었다. 오랜 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상대방에게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첫인사는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풍철한이 본래 그런 사람임을 아는 운대공자란 인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근심스런 얼굴로 재차 물었다.

"얼굴색을 보니 정말 병색이 완연하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소?"

"흐흐… 나라고 터지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헌데…."

풍철한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다가 피곤하다는 듯 빈자리를 보자 운대공자가 황급히 말했다.

"아…! 오랜 만에 만나 뵈니 소제가 정신이 없었소. 용서해 주시오."

그러더니 직접 풍철한에게 걸어와 빈 좌석으로 안내했다.

"앉으시오. 헌데 동행하신 분은…."

"친구라네. 인사하게나. 강남 운씨 세가의 대공자라네."

풍철한은 운대공자에게 대답을 하면서 조국명을 보며 말했다. 거리낌 없는 풍철한의 태도에 조국명은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을 감추며 포권을 취했다.

"산서의 조국명이라 하오."

"운규룡이외다. 헌데 아…! 신검산장의 대소사를 맡고 계신다는 그 분이시오?"

운규룡의 말에 조국명은 고개를 끄떡였다.

"시골구석에 박혀 있었던 본인이 언제 강남에까지 알려졌는지 모르겠구려."

그 말에 운규룡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아차'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의 변화여서 주의를 기울여 주시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였다. 운규룡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 신검산장이야 무림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이까?"

"자네가 언제 무림인이 되었나?"

풍철한이 농을 하듯 되묻자 운규룡은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로는 소제도 무림인이 아니오? 하도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니 주워들은 풍월만 가지고도 몇 권의 책을 쓰고도 남소. 하… 핫."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운규룡은 계속해서 대소를 터트렸다. 그러더니 문득 웃음을 그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런… 오늘은 소제가 정말 정신이 없는 모양이오."

운규룡은 자신이 본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두 인물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이렇게 만나신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나누시지요."

두 인물 모두 사십 전후해 보였는데 문사풍의 느낌이어서 지방의 유생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풍기는 기품이 고아하고 절도가 있어 범상치 않게 보였다. 칼날 같은 검미에 두툼한 입술을 가진 사내가 먼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풍철한과 조국명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양주(楊洲)의 윤건문(尹建門)이외다. 대명이 자자한 풍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양주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운하(運河)와 장강(長江)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중원 제일의 부(富)를 자랑하는 곳이다. 오죽하면 옛말에 양일익이(揚一益二)란 말이 나왔을까? 그곳에서 윤씨 성을 쓴다는 것은 염(鹽)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윤씨 가문의 인물이란 말이다.

윤건문의 인사에 이어 풍철한과 조국명이 금방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하기도 전에 그 옆에 있던 사내 역시 곧 바로 포권을 취했다.

"백결(柏缺)이라 하오."

인사는 간단했다. 하지만 이 사내가 누군가? 백련교 열명의 사형제 중 둘째로 타협과 화술에 뛰어나다고 알려졌으며 얼마 전 국경 근처에서 상대부를 포함한 명 사신 일행을 습격했던 그 사내가 아니던가? 그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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