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낙서, 낙서, 낙서!"

[해외리포트] 호주, 국제대회 앞두고 '낙서와의 전쟁'

등록 2005.09.28 17:15수정 2005.09.2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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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하우스에 쓰여진 반전구호. 윌 손더슨과 데이빗 버게스는 이 낙서로 징역 9개월과 15만1천 호주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사진은 호주 뉴스사이트에 실린 관련기사.
오페라 하우스에 쓰여진 반전구호. 윌 손더슨과 데이빗 버게스는 이 낙서로 징역 9개월과 15만1천 호주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사진은 호주 뉴스사이트에 실린 관련기사.
지난 8월말, 이른바 '낙서죄'로 기소돼 9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던 윌 손더슨(42)과 데이비드 버게스(34)가 출소했다.

두 사람은 2003년 3월 호주 정부의 이라크 전 참전 결정에 대한 반대시위로 시드니의 명물이자 아이콘인 오페라 하우스 맨 꼭대기에 'NO WAR'란 반전구호를 쓴 혐의로 체포돼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징역살이 외에도 낙서제거 비용 15만1천 호주달러(약 1억2천만원)를 오페라 하우스 측에 배상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시드니가 애지중지하는 오페라 하우스까지 올라가 반전 의지를 표출한 이들의 대담한 행위를 영웅시한 일면도 없지 않았으나 낙서행위로만 본다면 호주에서는 위와 같은 일이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사안도 아니다.

호주는 낙서(Graffiti Vandalism) 천국이다. 'NO WAR'와 같은 반정부적 의지나 주장을 표출하기 위한 '정치 사회적 구호형'이나 특정인에 대한 욕설, 외설스런 내용을 담은 '원초적 스트레스 해소형', 문자가 아닌 도형이나 그림으로 개인적 욕구를 표현하는 '순수 창작형', 이미 존재하는 그래픽을 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모방형' 등 다양한 형태의 낙서가 도시 곳곳을 도배하고 있다. 지난 2000년 퀸즐랜드 주에 신고 된 낙서만도 1800건에 이를 정도.

이런 호주에서 최근 '낙서와의 전쟁(Graffiti War)'이 선포됐다. 내년 3월에 개최되는 영연방 국가들의 스포츠경기인 코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 개최지로 선정된 빅토리아 주 멜버른을 필두로 호주 전역이 들썩이고 있는 것.

호주정부, '낙서와의 전쟁' 선포

어지러운 욕설 낙서로 가득 찬 벽면. 호주정부발행 책자에 실린 사진.
어지러운 욕설 낙서로 가득 찬 벽면. 호주정부발행 책자에 실린 사진.
2003년 9월 1일에 개정 강화된 낙서 관리법은 공공장소에 낙서를 했을 경우 5년 형, 학교 건물에 낙서를 했을 때와 낙서의 내용이 음란하고 외설스러운 표현을 담고 있을 경우는 7년형을 선고하고 있다.


또 전동차 등을 낙서로 훼손했을 때는 400호주달러(약 32만원), 기차나 역사를 훼손했을 경우는 최고 2200호주달러(약 176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등 일부 주에서는 18세 미만 청소년들에게는 낙서 원료로 주로 쓰이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팔 수 없도록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낙서행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2004년 7월부터 현재까지 멜버른 시의 낙서 제거 총면적만 4480㎡에 달했다. 이는 반 년 만에 1700㎡가 늘어난 결과다. 호주에서 낙서 제거에 들어가는 비용만 연간 100밀리언달러(정부, 개인부담 포함)에 육박한다.


낙서를 주로 하는 연령대는 12~17세 청소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은 역주변의 허름한 건물, 역사, 공원 벤치, 공중 화장실, 해변가 탈의실, 심지어 자동차나 기차의 안과 밖, 좌석 등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낙서의 대상으로 삼는다.

호주 정부는 코먼웰스게임 전에 낙서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겠다는 각오다. 이에 따라 낙서 행위를 적발하는 즉시 시민들이 신고할 수 있도록 전국적인 24시간 핫라인 신설도 검토되고 있다. 주에 따라서는 이미 범죄신고 라인인 '국번없는 000번'을 낙서범 신고에 이용하고 있는 곳도 있다.

낙서광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흰 벽면이 낙서로 더럽혀져 있다.(상) 정부는 진하고 어두운 색으로 외벽을 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하)
낙서광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흰 벽면이 낙서로 더럽혀져 있다.(상) 정부는 진하고 어두운 색으로 외벽을 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하)멜버른시홈페이지
각 시도의 행정 담당 부서는 '낙서로부터 내 건물 보호하기' 홍보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외벽을 휑하니 비워놓지 말고 둘레에 나무를 심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시야를 분산시킬 것, 야간에는 가능한 한 밝은 조명등을 밝힐 것, 건물의 외벽은 밝은 계통보다 어두운 계통으로 칠할 것, 매끈한 벽면보다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표면으로 처리할 것…. 낙서광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구체적 지침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주인들은 왜 낙서를 하는 걸까.

창조적 예술인가, 파괴행위인가

낙서행위의 원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대개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 갈등과 욕구 불만을 가진 10대 청소년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남긴 흔적으로 본다. 낙서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청소년들의 심리상태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

일각에서는 낙서가 청소년 범죄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공건물을 훼손한 뒤 또래들 사이에서 영웅심 내지는 공명심을 느끼게 되고 이 같은 과잉감정이 팽배해진 상태에서 범죄 집단의 가입 제안을 받게 될 경우 쉽게 범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는 것이다.

연방정부에서 나온 자료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낙서를 하는 행위는 조직 폭력배의 일원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통한다"는 분석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기차나 역사에 낙서하다 적발될 경우 최고 2200호주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호주정부발행책자에 실린 관련 사진.
기차나 역사에 낙서하다 적발될 경우 최고 2200호주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호주정부발행책자에 실린 관련 사진.
로렌 로즈웨인 교수는 최근 멜버른 대학이 개최한 정치과학 콘퍼런스에서 "청소년들은 갱이나 보스의 인정을 얻기 위해 보다 공개된 장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적발될 경우 중처벌을 면키 어려운 불안한 상황을 안은 채 낙서를 감행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로즈웨인 교수는 오래 전에 "공공에 노출되는 낙서는 눈에 거슬리는 옥외 광고와 함께 '시각테러'"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반대로 낙서를 하나의 예술행위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토니 테일러는 "낙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탄생한 기초적 현실참여의 수단이자 원초적인 예술표현"이라고 정의하면서, "대중을 향한 가장 직접적인 호소력을 담으면서도 창조성이 부여된 독특한 형식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낙서 예술가(Graffiti Artist) 메트유 피트도 "낙서는 반문명적, 반사회적인 것, 따라서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주입하는 자체가 잘못"이라고 강조하며 "청소년기의 들끓는 창조력과 표현 욕구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낙서가 단속의 대상이 되는 것은 특히 왜곡된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호주정부는 낙서가 젊은이들의 지하문화(sub-culture)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약, 가정폭력, 집단 폭행 등과 같이 그 자체로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못 박고 있다. 정부발간 책자 <낙서 및 공공 훼손 예방(Preventing Graffiti and Vandalism), 1990>은 낙서로 인한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물리적 피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낙서란 단지 제거나 복구에 드는 금전적 손실과 비용의 문제만은 아니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흉흉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며, 나아가 구체적인 범죄를 예고하는 바로미터로 인식되는 경향이 높다. 낙서가 많아질수록 도시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며 암울한 청년들의 미래, 시민들의 하락된 삶의 질 등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호주정부는 낙서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봉쇄하는 대신, 합법적 창구도 열어놓았다.

낙서도 당당한 예술임을 보여주는 공공 주차장 벽면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벽화 .
낙서도 당당한 예술임을 보여주는 공공 주차장 벽면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벽화 .신아연
범죄예방도 하고,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고

낙서에 대한 단속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청소년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자기 표현욕구 충족의 대안으로 낙서의 예술화 혹은 양성화를 활발히 추진키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음지의 독버섯처럼 취급되던 낙서가 이른바 '스프레이 예술(aerosol art)', '벽화 예술(wall art)'이라는 거리문화로 재탄생하고 있다.

아들레이드 인근의 소도시인 언리는 낙서광들의 지속적인 시달림을 받아온 2천 스퀘어미터 규모의 시민 광장 담벼락에 지역 청소년들을 동원해 18개월 동안 대형 벽화를 제작키로 했다. 호주를 상징하는 동식물과 토속적인 내용을 담아 벽화가 완성되면 흉측한 낙서로 지저분했던 시민 광장이 도시의 명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다.

호주정부는 청소년들의 표현 욕구를 위해 공공 장소나 개인 건물의 허가된 곳에서 벽화형태의 낙서를 양성화하고 있다.
호주정부는 청소년들의 표현 욕구를 위해 공공 장소나 개인 건물의 허가된 곳에서 벽화형태의 낙서를 양성화하고 있다.신아연
그 밖에 쇼핑센터나 버스환승장, 지하통로 등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 위치한 건물의 외벽은 물론 전봇대나 가로등, 도심 상징물, 도로표지판, 배전시설 등에까지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려 넣어 거리 예술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시청이나 구청 등 정부기관과 각급 학교에서는 방학 기간을 이용해 청소년들에게 벽화 기법을 가르치며, 기술전문대학 등에는 정식으로 '낙서기법'을 가르치는 강좌도 개설하고 있다.

남의 물건이나 공공건물에 낙서를 하는 행위 자체는 범죄이지만, 행위내용은 예술로 승화시키자는 게 호주정부가 추진중인 '낙서와의 전쟁'의 실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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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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