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자기의 그 오묘한 솜씨가..."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싶은 나의 치밀한 전략은 바로 칭찬입니다

등록 2005.10.01 01:08수정 2005.10.0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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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가을비치고는 꽤 큰 비입니다. 안 그래도 아침저녁 스산한 기운에 몸을 움츠리는 요즘인데 오늘은 비까지 내리니 호들갑스런 제 입이 춥다 소리를 연신 쏟아내며 오두방정을 떱니다.


하긴 오늘 같은 날은 따뜻한 방바닥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저녁거름에 보일러를 돌렸습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리니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노곤한 몸이 진저리를 칩니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려는데...

"아빠. 배고파요."
"좀 기다려봐. 엄마가 일어나야 저녁을 먹지."

"배 엄청 고픈데..."
"아빠도 마찬가지야. 그나저나 엄마가 어지간히 피곤한가보다. 저녁 때가 넘은 것도 모르고 자고 있으니."

"그럼 아빠가 저녁 하면 되잖아요."
"아빠가?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복희 뭐 먹고 싶어?"

"김치볶음밥. 저번에 아빠가 해주신 김치볶음밥 엄청 맛있었는데."
"김치볶음밥! 그게 그렇게 맛있었어? 그래 오늘 저녁은 김치볶음밥이다!"
"아싸! 오늘은 아빠가 김치볶음밥 하는 날이래요."


마치 꿈속에서처럼 남편과 딸아이의 소곤거림이 귓전으로 전해져 옵니다. 따스함의 유혹에 맥없이 빠져들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근 한 시간을 방바닥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직무유기를 겁 없이 행사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 핑계 김에 장에 간다고. 어차피 게으름 피운 거. 오늘 저녁은 풀코스로 한번 호강해 보는 거지 뭐.'


"오늘은 아빠가 김치볶음밥 하는 날"

주방 쪽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릇 마주치는 소리, 물소리, 거기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부녀지간의 하하 호호 웃음소리까지 끊이질 않고 있었습니다.

몸은 방안에 누워 있었지만 이미 저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졸졸졸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입가로 슬그머니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잠시 후면 분명히 저를 깨우러 올 것이란 생각에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살며시 방문이 열렸습니다.

a 푹삭은 김장김치를 먼저 자작하게 볶는다.

푹삭은 김장김치를 먼저 자작하게 볶는다. ⓒ 김정혜

"복희 엄마! 복희 엄마! 잠깐만 일어나봐. 김치볶음밥 하려고 하는데 김장김치 어디 있어?"
"..."

"잠 깬 거 다 알아. 어서 일어나봐. 김장김치 통이 어떤 건지만 말해줘 봐."
"김치 냉장고 오른쪽 칸 맨 위에 거."

a 자작하게 볶은 김치에 호박과 양파를 넣는다.

자작하게 볶은 김치에 호박과 양파를 넣는다. ⓒ 김정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정말 몸살이라도 난 사람처럼 두 눈을 꼭 감고는 한껏 앓는 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남편이 방에서 나갔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들어 올 것입니다. 들기름이 어떤 거냐고 물을 겁니다.

a 호박과 양파를 넣은 다음 한 번 더 살짝 볶는다.

호박과 양파를 넣은 다음 한 번 더 살짝 볶는다. ⓒ 김정혜

다음은 호박과 양파를 좀 썰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남편은 기어이 저를 주방으로 불러 낼 것이며 저를 곁에 세운 채 김치볶음밥을 할 것입니다. 역시나 오늘도 제 예상은 백발백중입니다.

a 호박과 양파를 살짝 볶은 다음 밥과 계란을 넣는다.

호박과 양파를 살짝 볶은 다음 밥과 계란을 넣는다. ⓒ 김정혜

"복희 엄마! 들기름은 어떤 거야?"
"가스렌지 밑에 있는 씽크대 문 열면 오른쪽에 소주병 있지. 그 거야."

"복희 엄마! 호박하고 양파만 썰어주면 이제 진짜 자기 안 부를게."
"내가 앓느니 죽는다."

a 밥이 노릇노릇 눌을 때까지 잘 볶는다.

밥이 노릇노릇 눌을 때까지 잘 볶는다. ⓒ 김정혜

자취생활 10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남편은 결혼 후에도 여전히 요리하기를 좋아합니다. 라면이나 김치볶음밥, 김치국밥, 김치찌개, 떡볶이, 비빔국수 등등... 은밀히 따지고 보면 오히려 저보다 남편의 요리솜씨가 좋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남편이 여전히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a 마침내 완성된 남편이 만든 오묘한 맛의 김치볶음밥

마침내 완성된 남편이 만든 오묘한 맛의 김치볶음밥 ⓒ 김정혜

"복희 아빠! 진짜 맛있다. 어쩌면 이렇게 오묘한 맛을 낼 수 있어? 일류주방장 저리가란데. 진짜 재능이 아깝다."

바로 저의 칭찬입니다. 입에 침을 튀겨가며 오묘한 맛까지 들먹이는 데야 어찌 남편도 으쓱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꺼이 요리솜씨를 발휘합니다. 결국 저의 침 튀기는 칭찬이 남편에겐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유혹의 몸짓인 거죠. 남편인들 어찌 거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으려면

어쩌다 한번씩 남편이 집에서 노는 날이라든지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라든지 난데없이 으슬으슬 몸살기운이 덮쳐오는 그런 날에는 저도 가만히 앉아서 남편이 차려주는 황홀한 밥상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남편의 요리솜씨를 정확히 겨냥하고선 칭찬의 화살을 아낌없이 날립니다.

"복희 아빠! 오늘은 왠지 자기의 그 오묘한 김치볶음밥이 미치도록 먹고 싶네."

어느새 남편은 주방으로 향하고 남편의 콧노래는 고소한 들기름에 섞여 우리 집 구석구석을 꽃노래로 흥겹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혼자서 요리를 하는 게 딴에는 심심했던지 저를 주방으로 불러들여 함께 요리하는 법을 나름대로 터득한 것 같았습니다.

두어 번 귀찮게 물어대면 성질 급한 제가 분명 주방으로 달려 나오리란 걸 남편이 기가 막히게 알아챘던 겁니다.

하긴 남편 혼자서 요리를 할 땐 요리하면서 늘어놓은 뒷설거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편하게 밥 한 끼 얻어먹으려다가 아예 주방 대청소를 해야 할 때가 다반사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저를 주방으로 함께 끌어 들인 후부터는 남편이 요리를 할 때 곁에서 바로바로 널어놓은 것을 치우다보니 오히려 뒷설거지거리를 만들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방에서 어깨를 부딪혀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것이 생각보다 꽤 좋은 부부대화법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저녁. 남편이 만든 김치볶음밥은 역시나 그 맛이 오묘했습니다. 나름대로는 비법이랍시고 푹 삭은 김장김치를 미리 자작하게 볶는 것이라든지 또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넣는다던지 맨 마지막엔 노릇노릇 눌리는 것까지.

하여간 우리 남편의 김치볶음밥은 오늘도 어김없이 저와 딸아이를 감동시켰습니다. 정말 맛있다는 저와 딸아이의 칭찬에 남편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마구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웃음. 그건 바로 저의 행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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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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