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내와 자식에게 우산이 되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지금 누가 40대 우리들에게 우산을 씌어줄까.노순택
얼마 전 동호회 모임에 나갔을 때 일이다. 이제 갓 마흔인 내게 다섯 살 많은 선배가 발칙한(?) 질문을 했다.
"야! 지영아! 너 혹시 요즘 책 읽을 때 책 잡은 손 멀리하지 않냐?"
선배는 두 손에 책을 잡은 모양으로 가슴에서 멀리 뻗는 친절한 모션까지 덧붙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뇨. 근데 그건 왜요?"
"나는 나이 40이 되니까 눈이 침침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나오더라. 너도 이제 슬슬 돋보기를 준비해야 할 거다. 이제 너도 중년 아니냐."
"!"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중년이라니...' 물론 찬란하게 젊은 시절은 갔지만 왠지 중년이란 소리를 듣고 보니 마른 손바닥에 모래가 비벼지는 듯한 이물감이 드는 것이었다. '아직 아이도 어리고 마누라도 청바지 입고 나가면 처녀소리 심심찮게 듣는다고 할 정도인데 내가... 중년이라니...'
나는 느닷없이 내게 얽어진 중년이란 단어를 가슴에 무겁게 얹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자마자 인터넷을 뒤졌다.
중년(中年)[명사] 마흔 살 안팎의 나이
'헉~'사전적 의미로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이었다. 눈이 침침해져도 결코 놀라거나 피하지 못할 나이가 맞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늦은 음주가무가 시름해지기는 했었다. 멀리 나가 바깥 잠이라도 잘 적엔 마누라 있고 아들이 있는 방안 풍경이 몹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친구 녀석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면 대뜸 그러자고 한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고, 가슴 크고 얼굴 예쁜 여자를 보며 괜한 상상에 젖었던 시절이 아련하더니만 바쁜 일상에 묻혀 결국은 슬금슬금 중년의 문턱에 덜컥 와 버린 것이었다.
불혹(不惑)에 찾아드는 세 가지 절망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매주 한 번 정도는 만나 술 한 잔 씩은 나누었던 절친한 선배의 말이 이랬다.
"지영아. 남자 나이 사십이면 세 가지 절망에 빠지게 돼있다. 첫째는, 건강에 대한 절망이고 둘째는 경제에 대한 절망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에 대한 절망이다."
이제 곧 사십인 내가 귀를 쫑긋하지 않을 수 없게 선배의 표정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사십을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금연하고, 없는 자존심 바닥까지 드러내며 비굴하게 회사에 붙어 있지만 그 마지막, 사랑에 대한 절망은 말이다. 더 이상 나를 가슴 설레게 하는 로맨스는 있을 수 없다는 아주 절망적인 사실을 인식한다는 거지."
선배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중년들에게서 불륜이 많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사실인식에 저항하는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절박한 심정인 것이지."
선배의 말이 끝나고 나는 상당히 동의한다는 뜻으로 움켜쥔 소주잔을 단 번에 비워버렸지만 송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 사십에 던져지는 불혹(不惑)이라는 말이 세상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일 테지만 어쩌면 그만큼 유혹이 많은 나이 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건강에 대한 절망과 경제에 대한 절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절망 중에서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는 절망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제 갓 사십이어서인지 아직 절망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 않다. 다만 나를 관통해온 삼십대 시절에 가졌었던 감성의 고점들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들은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부양해야 할 가족들 생각에 아직껏 내 인생에 대한 예우는 한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아쉬움이 다시 밀려왔다.
이제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