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액자 뒤에서 통장 3개를 꺼내시면서 비밀번호와 함께 통장의 쓰임새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전에 고향집 풍경 기사를 쓰려고 찍은 사진인데, 아픈 내용의 사진으로 쓰네요장희용
"아버지 말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하거라"
어제는 큰 어머니 제사라 회사 일이 끝나고 밤에 시골에 갔다 왔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마당에서 기다리시다가 곧바로 큰 집으로 가실 아버지였는데, 차 시동을 끄고 방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 가시자마자 큰 누나 결혼사진 액자를 벽에서 떼어내십니다. 액자 뒤에서 통장 3개를 꺼내 방에 펼쳐 놓고서는 "네 형이 있으니 마땅히 장남인 네 형한테 할 말이겠지만 이런 말을 하면 네 형 성격에 아버지 말을 찬찬히 들을 것 같지 않아 대신 너한테 말하니, 지금부터 아버지가 하는 말 하나도 흘리지 말고 잘 기억해 두었다가 아버지 말 그대로 하거라" 하십니다.
"늙으면 다 그렇지만 이제 자전거 타다가도 자꾸만 기력이 딸려 넘어지고, 네가 들으면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겠지만 어제도 저 건너 00이가 늙은 호박 가져가라고 해서 네 형수하고 네 댁하고 약 해주려고 그거 따러 가다가 또 넘어졌다. 이제 아버지 몸이 다 되지 않았나 싶구나. 그리고 아버지가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기억이 자꾸만 가물가물 하니 네가 아버지 대신 잘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하거라.
아버지가 잘못되면 이 돈을 가지고 네 사촌 형을 찾아가거라. 네 형은 알아서 하겠다고 하겠지만 아직은 너희들이 큰일을 겪어보지 못했고, 형이나 너나 객지 생활을 오래 했으니 일을 치르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형이 뭐라고 해도 아버지 마지막 말이었다며 네가 형을 설득해서 네 사촌한테 일을 맡기거라. 내가 네 큰 사촌한테는 미리 언질을 해 놓았다.
다른 하나는 네 엄마 이름으로 돼 있다. 아버지 말을 곡해해서 듣지는 말거라. 너희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자식이 효자라 해도 늙어서 부모가 돈 한 푼 없으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이다. 전에 수술할 때는 아버지가 네 걱정이 제일 앞서더니 이젠 네 엄마가 걱정이구나. 너도 알다시피 네 엄마가 배우지를 못해 은행가서 돈도 찾을 줄 모르니 네가 엄마 눈치 봐서 필요한 것 같으면 다만 얼마씩이라도 이 통장에서 빼서 드려라."
"죽을 때까지도 부모는 부모 도리 다 하고 죽어야 되는겨"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손으로 통장을 집더니 자식 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고,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통장 어서 집어넣으라고 소리치십니다.
"어허, 가만히 있어봐. 누군가는 알아야 할 일이여. 내가 오늘 한 일도 자꾸 잊어버리는데, 이러다 덜컥 잘못되면 다음 일은 어떻게 할 거여. 부모는 죽을 때까지도 부모 도리를 다 하고 죽어야 되는겨. 그게 부모인겨."
어머니는 죽기는 왜 죽느냐 면서 속상한 마음에 화를 내시면서 방을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아버지 말씀대로 아버지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머리로 기억했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통장 하나는 형수님과 제 아내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라면서 형이나 저는 그 통장에서 단돈 일원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이 며느리들 고생을 시켰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해서 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엄마를 모시다보면 아무래도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신경을 쓸 터이니, 빠듯한 생활비에서 시장 보지 말고 이 돈을 따로 보관하다가 시장 갈 때마다 빼 쓰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