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빚어내는 무자비한 착상을 보다

대학로에서 연극 <춘천거기>를 보고

등록 2005.10.10 14:06수정 2005.10.1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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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웃음이 객석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다. 그렇다고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코미디로 오해하면 섭섭할 듯싶다. 만화책보다는 순수소설에 가깝다. 발을 구르며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자세로 웃기엔 애증이 서려있는 목소리가 맘에 걸린다. 때론 고성을 내지르고 너무 울어 눈이 부어오르는 등장인물들. 그들이 춘천으로 모여든다. <앵콜 춘천거기!>는 오는 10월 30일까지 씨어터일 무대에 오른다.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사랑 에피소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얘기는 특히 닮아있다. 여기 그 닳고 닳은 사랑타령을 다시 읊조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지루하리라는 예상은 빗나간다. 2시간 동안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그들의 손아귀는 꽤 견고하다.


커플이 세 쌍이나 등장한다. 우선 불륜 커플. 남자가 유부남이다. 게다가 비전도 별로 없어 보인다. 꿈을 가지라는 여자의 말에 희망을 가지면 맘만 상한다고 대꾸한다. 자기는 대서양 한가운데 침몰한 보물선 찾기 안한다는 이 남자의 사랑.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2년차 증후군에 시달리는 두 번째 대학생 커플은 꼬여 있다. 과거의 연인과 현재의 연인이 공존해 얽혀있으니 풀기 힘들만하다. 거기다 남자 주사가 좀 심한 듯. 춘천 펜션에 모두 모인 술자리에서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다 급기야 울부짖고 만다. 여자 친구의 과거남자를 잘 알아 그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이 남자.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새로 시작하는 세 번째 커플은 즐겁다. 대개 호감이 넘쳐나는 동안에는 단점이 안보이는 법이니. 처음에 깍듯하게 말을 높이던 남자는 어느 순간에 말을 놓을까. '오빠'란 호칭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말투를 바꾼다. "원래 집이 서울인가?" "귀엽네."

이 세 커플은 서로 적당히 아는 사이로 연결되어 있다. 커플 아닌 등장인물도 셋이다. 극작가 수진, 연출가 병태 그리고 영어강사 지환. 아직 짝이 맺어지지 못한 이들도 추파를 던지는 과녁은 있다. 연정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지 않은가. 다만 화살이 자꾸 과녁을 빗나가서 문제일 뿐.

핸드폰코드 그리고 진실게임


요즘 모 통신회사에서 공중파로 쏟아내는 '내가 만들어가는 생활의 중심' 현대생활백서 광고시리즈.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휴대전화문화를 전하고 있다. <춘천 거기>도 그렇다. 등장인물은 종종 통화중이고 핸드폰 진동이 울리거나 혹은 문자를 보낸다.

전화하기로 하고선 아예 전화를 꺼놓은 데서부터 싸움이 촉발한다. 둘만 있을 때 걸려온 전화를 받느니 안 받느니 하며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전화하려는 상대방 핸드폰 플립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이런 핸드폰코드는 현실 속 사사로운 문화를 담아내는 창작극의 매력이 아닐까. 대사 속에 과거 해태 홈런타자 김봉연이나 신세대 골게터 박주영이 등장하는 것도 우리네 대중정서와 맞닿아 있다.

춘천, 엠티 혹은 모임, 진실 게임으로 이어지는 상황 역시 기억을 자극하는 친숙한 네러티브다. 극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등장인물들은 춘천에 펜션에 모여 진실게임을 벌이는데, 보는 이도 함께하는 느낌이다. 정전이 되는 설정과 배우와 같은 공기를 마시는 소극장의 매력이 그 강도를 더한 듯하다.

춘천에 있는 펜션에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관객도 배우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춘천에 있는 펜션에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관객도 배우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춘천거기
진실게임 그 자리에 <춘천 거기> 극작가가 있다면 묻고 싶다. '혹시 불륜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어떻게 그리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나요?' 벌주로 답변 회피하기 없음. 흑기사도 불가.

유치하게도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건 수진과 병태가 나누는 대화 때문이기도 하다. 춘천에서 생일상을 받은 수진은 잠시 '제자리'를 벗어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한다. 이에 병태가 수진이 말한 제자리가 '제 자리 걸음'에 제자리인지 '자기 자리'에 제자리인지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내가 말한 건 일탈의 의미인데 '제 자리 걸음'에 제자리도 포함시켜야겠다. 일탈을 해봐야 발전이 있고, 고이지 않고, 썩지가 않으니까."

화관을 쓴 독백소녀, 시를 읊다

작가 수진은 속 썩이는 짝이 없는 대신 자신이 쓴 희곡 속 독백소녀를 걱정한다. 암전이 되기 직전마다 등장해 독백을 하는 데 뜬금없을 것 같다는 우려다. 그래서 머리에 화관을 씌워 어색함을 덜고자 한다.

사실 이 독백소녀는 <춘천 거기>에도 등장한다. 극 속 수진의 희곡이 <춘천 거기>의 대본이 되는 '이중구조'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화관을 쓴 독백소녀는 덜 어색했을까. 관건은 소녀의 차림이 아니라 그녀의 말일 것 같다. 적어도 대학생 커플에게 한 독백은 훌륭하다.

"바람에 우산을 젖히듯 달려들고/ 무심히 팔자 좋게 술 한 잔 떠올리는 궁핍한 청춘아/ 멍한 틈 사이사이로 정신없이 빠져나가는/ 하루의 끝자락마저 보내놓고/ 한숨으로 저녁 짓는 박약한 청춘아/ 비도 멎고 바람도 쉬고 술도 깨었는데/ 길게 남아 찰나로 마주한 인생에 맞담배/ 꼬다무는 청춘아"

'이중구조'와 같은 형식미가 주는 보너스는 한 가지 더 있다. 관객이 여성이라면 극중 잘생긴 영어강사 지환과 연극 '젓갈과 동치미'를 보는 행운을 잡을 수 있다. 그 방법은 직접 관람을 하면 알 수 있을 터. 배우와 함께 무대에 서 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일 것이다. 관객과 호흡하려는 극단의 의지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더하는 장치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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