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도 많이 변해 있었다. 검은 머리는 어느새 반백으로 물들어 버렸고, 각이 져 반듯하던 얼굴선이 세월의 흔적과 함께 굴곡을 보이고 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누군가 건들면 터질 것 같던 긴장감과 냉혹함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대신 연륜이 느껴졌다. 그늘이 진 음습함과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하는 예리함은 천성인 듯 여전했지만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여유와 일대 종사의 기품이 어느새 몸에 배어 있었다.
우교는 무영도를 뽑아들며 동자배불의 형식을 취했다. 연륜이나 무림배분으로 보아 우교가 한참 선배가 분명했지만, 우교에게 있어 초혼령주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는 담천의에게서 담명장군의 잔영을 보고 있었다.
사실 살상 병기를 마주 대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우교는 목적이 있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조심하시길…!"
도를 똑바로 세우자 갑자기 눈을 찌르는 듯한 예기(銳氣)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도와 몸이 합일(合一)될 때 보일 수 있는 기세다. 불빛에 반사되는 도신의 광휘는 이미 우교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귀하 역시 조심하시오."
담천의는 우교의 자세 하나만 보고도 그의 무공수위가 절정에 달했음을 느꼈다. 저런 인물이라면 추호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담천의 역시 신중하게 만검을 뽑아들고는 허공에 삼검(三劍)을 그었다. 상대에 대한 예를 표하고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자 우교의 신형이 좌측으로 두 걸음 옮겨지더니 곧 바로 쏘아왔다. 무영도의 끝에서 기이한 문양(紋樣)이 뿜어지며 허공에 흩날렸다.
(육합난비(六合亂飛)…!)
그것이었다. 어찌 부친과 관계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첫 초식으로 육합난비를 펼치는 것일까? 강명이 그랬고, 이번에는 우교가 펼치고 있었다. 아마 자신에 대한, 아니 부친에 대한 예의일지도 몰랐다.
이미 담천의 역시 알고 있는 초식이었지만 우교가 펼치는 육합난비는 또 다른 생소함을 느끼게 했다. 강명이 펼치던 육합난비와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강명이 펼치는 육합난비는 빠르고 강렬했다.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광폭함과 강맹함이 있었다. 하지만 우교가 펼치는 육합난비는 빠른 가운데 음습하고 날카로웠다.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면서 치명적인 공격에 중점을 둔 모습이었다.
이렇듯 똑같은 초식이라도 익히는 자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배운 초식을 자기 것으로 완벽히 만들었느냐 하는 것. 강명이나 우교의 육합난비는 그 초식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분명한 것은 두 인물 모두 육합난비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
담천의는 좌측으로 돌면서 자신의 가슴과 아랫배를 동시에 노리고 찔러오는 우교의 도를 피하며 검을 비스듬히 세워 오른쪽으로 쳐내려 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담천의 검이 우교의 도를 옆으로 쳐내는 순간 우교의 도가 검신을 타고 오르며 빠르게 세 번을 찌르고 있었다. 담천의의 미간(眉間)과 인중(人中), 그리고 목젖을 노린 기쾌한 공격이었는데, 그 변화가 너무 빠르고 치명적이어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한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담천의의 상체가 뒤로 활처럼 휘었다. 미간과 인중, 그리고 목젖은 한 치만 도가 파고들어도 절명하는 곳이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상체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따라붙는 우교의 도를 피하기 위해서 그는 균형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위태롭게 네 걸음이나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오른 발로 우교의 하체를 노리고 차는 것과 동시에 우교의 손목을 노리며 검을 위로 쳐올렸다. 왼발 하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무방비로 있던 자신의 하체를 보호함과 동시에 상대의 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는 우교의 공격을 잠시 지연시키는 효과를 노린 수였다. 임기응변이었지만 일단 따라붙는 우교를 주춤하게 만들었고, 담천의는 왼쪽으로 급하게 돌면서 위급한 순간을 벗어났다.
자세를 가다듬기 전에 담천의는 다급한 순간 멈췄던 숨을 내쉬면서 여전히 따라붙는 우교를 향해 검을 떨쳐냈다. 그의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그가 펼치는 초식 역시 육합난비였다.
스으---
그가 펼치는 육합난비 역시 강명이나 우교의 것과 달랐다. 눈에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느릿하고 변식이 없는 아주 단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이하게도 느릿하게 보이는 그의 검은 어느새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었고, 그는 빠르게 몸을 돌리며 도신을 수직으로 세우고 담천의의 검을 쳐냈다.
파파파팍----!
검과 도가 마주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우교는 빠르게 도를 펼치고 있었지만 파고드는 담천의의 검세를 멈출 수 없었다. 그가 황급히 세 걸음 물러남과 동시에 양 손으로 무영도를 쥐며 수직으로 내리 꽂았다. 직도황룡(直刀黃龍)의 초식처럼 보였지만 도기가 다섯줄기로 갈라지며 담천의의 상체를 난도질할 듯 쏘아나갔다.
츠으---
한 순간 쇠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엉켰다가 떨어졌다. 두 사람은 어느새 처음 마주서 있었던 그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조금 전의 급박한 손속 교환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처음과 다른 것은 우교의 가슴부위에 옷이 반 자 가량 예리하게 베어져 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우교의 얼굴에 처음 미소라 할만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불빛에 그의 이가 살짝 반짝인 것 같았는데 본래 무표정한 얼굴에 나타난 그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정을 봐주어서 감사드리오."
"사정을 봐준 것은 귀하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소? 나는 좋은 경험을 했소."
"…?"
"알고 있는 초식이라 해도 펼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오. 내가 완벽히 익힌 초식에 나 역시 당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오."
솔직한 말이었다. 우교가 펼친 육합난비는 분명 자신이 확연하게 꿰뚫고 있는 초식이었지만 그것이 변화를 일으키자 오히려 그 초식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이함과 함께 대응하기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큼 우교가 펼친 육합난비는 독특하고 치명적이었다.
"같은 음악이라도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요. 영주의 육합난비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소."
아무리 막으려 했지만 결국 앞섬을 베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육합난비에 의해서였다. 우교는 무영도를 내려뜨렸다. 무슨 뜻일까? 이미 승부를 포기했다는 의미일까? 우교는 잠시 담천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검과 도를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부탁이라니…? 더구나 그의 말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정감이 담겨 있었다. 뜻밖의 모습에 담천의는 우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담천의가 뭐라 하기 전에 우교가 신중하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완벽하게 죽여주시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다. 죽음에 있어 완벽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로부터 한 시진 뒤 그 연무장의 모든 문이 열리고 그곳을 걸어 나온 인물은 오직 담천의 한 사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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