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오십에 발견한 바다가 뭐여?"

예산여성농업인센터 주최 여성 농민, '엄마는 오십에…' 연극 관람

등록 2005.10.17 14:15수정 2005.10.1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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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단장한 주부들이 하나 둘 차에 오른다. 농사일에 검게 그을린 얼굴색만 아니면 누구도 이들이 농촌 출신임을 눈치채기 어려우리라. 마흔네 명 신청을 받았는데, 아뿔사! 총 인원이 마흔다섯 명이란다. 동네 사람이 간다 길래 따라나선 이가 한사람 더 있는 까닭이다. 남은 표가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뭐 일단 가고 보는 거다. 출발!

지난 11일 예산여성농업인센터(대표 조강옥)가 마련한 연극 나들이 풍경이다. 정부가 복권기금으로 문화소외지역 주민들에게 공연 관람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가 신청을 해 얻은 귀한 기회다.


단돈 5000원만 내면 대절 버스를 타고 유명 연극을 무료로 볼 기회라니, 농번기인데도 많은 신청자가 몰렸다. 여기 오기 위해 새벽부터 집안일, 밭일하느라 분주했음은 경기도 일산까지 가는 차 안의 풍경에서 충분히 짐작이 됐다. 응봉에서 오후 3시에 출발해 5시 30분에 도착하는 동안 차안은 고요했다. 대부분 곤한 잠에 빠졌으므로.

a 금강산도 식후경. 도시로 문화나들이온 여성 농민들이 주차장 한켠에서 준비해 온 김밥을 먹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도시로 문화나들이온 여성 농민들이 주차장 한켠에서 준비해 온 김밥을 먹고 있다. ⓒ 장선애

예상보다 길이 막히지 않아 공연 시간보다 두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일산 신도시 아파트 빌딩 숲 안에 자리잡은 공연장의 이름은 '별모래 극장'이란다. 불야성인 이런 도시에서도 하늘에 별이 모래처럼 많이 뜬다는 것일까. 아무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공연장 뒷편 주차장에 주저앉아 준비해 온 김밥을 먹었다.

"오십에 뭘 발견했다는겨, 바다를 발견했다는 게 뭔소리여?"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긴 연극 제목이 심상치 않은지 들뜬 목소리가 넓디 넓은 공연장을 둘러보는 내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좋다." "우리 아들네도 이 근처 어딜 텐데…." "여기 오느라 어제 죙일 고구마 캤어." "잘 보고 잊어 먹지 않아야 가서 얘기해 줄 틴디... 큰일이네."


드디어 공연 시작. 2시간 가까이 계속된 연극을 보는 동안 객석은 조용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이 품을 떠났거나 떠나려는 즈음의 황혼기 여성 이야기를 보며, 아마 '나의 인생'과 '내 어머니의 삶'을 떠올렸으리라. 여기 저기 가는 한숨소리도 들리고, 가늘게 어깨가 들썩이기도 한다. 이윽고 연극이 끝난 뒤 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행여 붉어진 눈자위를 들킬까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데 눈을 두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 같다.

a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주연인 박정자씨와 무대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이례적인 혜택이 주어졌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주연인 박정자씨와 무대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이례적인 혜택이 주어졌다. ⓒ 장선애

연극이 끝난 뒤 무대에서 주연인 박정자씨와 기념 촬영을 하는 특별 기회까지 얻었다. 관계자들은 기겁을 했지만 "농촌에서 사과 따다 말고 연극 보러 왔다"는 아주머니들이 사진 좀 찍자 하니 우리 나라 대표배우 박정자씨 "기왕이면 무대에서 찍자"고 한술 더 떠 이례적인 사고를 친 것이다.


다시 출발지인 응봉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다 돼서다. 오는 동안에도 차 안은 역시 조용했다. 이번에는 자는 사람이 몇 명 안되는데도.

"연극을 처음 봐서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엄마가 오십에 왜 바다를 발견했다는 것인지, 그 바다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경기도를 막 벗어날 때쯤 이었던가. 40대초반으로 보이는 한 동행인의 말은 차안이 조용했던 까닭을 깨닫게 한다. 뉘라서 그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가. 그날 농사일 잠시 물려 놓고 나들이한 이들 가슴에 서로 다른, 또 얼마큼은 닮은 느낌으로 살아 있을 것을.

그리고 평생 처음 '연극 구경'한 이들이 절반 이상인 이날 동행인들의 가슴에 이런 소망 하나 품었으리라. 도시 사람들처럼 저녁 먹고 마실 가듯 이런 문화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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