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 조용필도 여기에서 컸어요"

2005년에 만난 70년대 DJ 장민욱씨

등록 2005.10.21 14:41수정 2005.10.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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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V1@ 한 우물 파는 일. 말이 쉽지 보통 일이 아니다. 앞에서 펌프 놓는데 옆에서 또 상수도 파지, 앞서 간다고 모두 야단인데 혼자 묵묵히 우물을 판다? 앞서가는 것만 좋아하는 세태에서는 처진 사람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사람들이 잊고 있는 분야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세태 속에서 장민욱(50)씨는 꿋꿋하게 한 우물을 파고 있다. 그것도 기꺼이. 추억 여행을 위해 그를 찾아가는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비땅>. 전라도 사투리로 부지깽이를 일컫는 '비땅'은 말하자면 DJ가 있는 음악카페다. 장민욱씨는 그곳에서 부지깽이 역할을 하고 있다. 아궁이(추억과 음악)에 불을 지피기 위해 부지깽이(LP음반과 턴테이블, 그리고 DJ)는 필수 아니겠는가. <비땅>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LP 음반의 정겨운 잡음이 귀에 우선 꽂혔다. 이어, 모자부터 바지까지 블루진 일색에 빨간 셔츠를 받쳐 입은 그가 나왔다. 여기부터가 DJ 장민욱씨의 세계다. @IMG1@한 우물 파는 음악다방 DJ, 장민욱씨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뜨거운 안녕>을 불렀지요. 친구들은 열광했는데 학생이 유행가 부른다고 담임한테 혼났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부터 대중음악이 좋았어요. 커가면서 팝송에 푹 빠졌지요.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 음악다방을 찾기 시작했고요. 워낙 자주 드나드니까 어느 날인가 기회가 오더라고요. 펑크 낸 DJ 대신 마이크를 잡았어요. 그게 1974년이에요." 우연하게 데뷔한 뒤 그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오랫동안 DJ로 명성을 쌓았다. 70, 80년대 음악다방 DJ의 인기는 연예인 못지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의 DJ 장민욱. 장씨는 "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인기폭발 DJ는 아니었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눈 감고 그의 멘트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추억 속에 빨려 들게 된다. 그런 그에게도 열성 팬이 있었다. 하도 만나달라고 졸라서 대여섯 번 만나줬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쫓아다녔다고. 거의 1년여를 고생한 끝에 떼어내긴 했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수차례 업소를 옮겨야 했을 정도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라고. 지금 말로 하자면 대단한 스토커였던 셈이다. 음악다방의 인기 척도는 당시 대중가수들의 성공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요즘에는 가수들이 음반을 내면 방송국 PD를 찾지만 그때는 음악다방 DJ들을 찾았다. 손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언젠가는 인기를 끌었다. 손님들도 그 음악을 찾았고. 그렇게 뜬 가수들은 생명이 길었다. "다운타운에서 뜨지 못하면 히트곡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 70, 80년대랍니다. 그때는 가수들이나 매니저들이 음반 나오면 유명한 음악다방들을 순회했지요. 국민가수 조용필씨도 처음에 음악다방에서 전폭 지지한 경우입니다. 윤시내씨의 <열애>도 그랬고, 김연숙씨의 <그날>도 그랬지요. 셀 수 없을 정도예요." 부산의 <무아>, 대구 <환상의 섬>, 대전 <르네상스>, 광주 <태평양>, 천안 <아카데미>, 강릉 <넘버나인>, 동인천 <헤드폰>, 서울 종로 <무아> <희다방> <청궁>, 영등포 <미진> <상아탑> <꽃샘> <본전> 그리고 신촌 <독수리> <빠리> <복지다방> 등이 그 시절 젊은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던 음악다방들이다. @IMG2@"그 땐 음반내면 음악다방 DJ부터 찾았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절에 음악다방에서 만나 결혼한 사람들이 꽤 되지 않겠냐며 장민욱씨는 환하게 웃는다. "언젠가 한 번 중년의 손님들이 들어오셨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뮤직박스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전화를 하시는 거 있죠? 보니 부인과 통화하시는 듯했는데 무조건 빨리 오라는 거예요. '당신과 내가 만난 그 음악다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 손님의 연애 시절을 돌이킬 수 있는 음악들을 선곡해 드리는 것으로 선물을 대신 했죠." 그에게도 애틋한 추억이 있다. 20대 피 끓던 시절, 한 여학생과의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가 30여년 세월동안 그의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청주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서울로 실습 나온 여학생이었는데 대학노트 두 권이 빼곡하도록 연정을 담은 사연을 보내주었지요. 그 여학생의 부모님께 인사 갈 정도로 사이가 발전했었는데 당시 교장 선생님이셨던 그 쪽 아버님의 반대가 너무 심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 여학생이 좋아했던 음악이 'J. D. Souther'의 <유 아 온리 론리(You are only lonely)>였습니다." 심술궂은 마음에 혹시 부인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냐고 슬쩍 물으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감출 게 없다"고 받아치며 오히려 되묻는다. "음악다방 DJ로 방탕하지 않게, 오로지 음악만을 위해 살아왔던 평생이에요. 떳떳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도 없지 않겠어요?" 사실 그가 이렇듯 당당한 건 지금의 아내와 만난 일이 더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인 듯하다. 20대 중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일하던 음악다방 근처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발견하고는 무조건 쫓아갔다. 그리스의 유명한 여가수 '나나무스꾸리'처럼 긴 생머리가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그렇게 5년간 열애를 나눈 뒤 86년 5월 18일, 결혼에 골인했다. 그 후 20년 동안 아내는 낡은 LP판을 돌리는 그를 묵묵히 곁에서 지켜주었다. 처음에는 아빠의 직업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고등학교 3학년인 딸도 지금은 조금씩 이해해준다고. @IMG3@세월의 흐름 따라 음악다방 DJ는 사라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DJ도 유행을 탔다. 80년대 중반, 음악다방 DJ의 인기가 한풀 꺾일 무렵 신당동 떡볶이 골목과 영등포 학사주점 골목에는 '개그 DJ'라는 신종 DJ들이 서서히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DJ로서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음악을 제대로 소개하고, 깊이 있는 '멘트'를 날릴 수 있는 음악 DJ로 남고 싶었다. "고집이랄까, 저는 음악을 제대로 소개하는 DJ로 남고 싶었어요. '언어유희'와 '웃기기'는 제 특기가 아니었거든요. 젊을 때는 <월간팝송>을 끼고 살면서 공부했었죠." 그렇게 지나온 세월이 30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커피를 마시면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손님들도, 턴테이블과 LP판을 생명처럼 여기던 DJ들도 모두 세월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음악다방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장민욱씨는 남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인천 계산동에 후배와 함께 지금의 <비땅>을 연 것. 오래 되지 않았지만 <비땅>과 장민욱씨에 대한 이야기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의 후배가 장씨의 자문을 얻어 인천 송도에 <디제이리멤버>를 열었고, 서울 봉천동에도 <올드팝>이라는 음악다방이 새로 생겼다. 추억을 찾기 위해 <비땅>을 찾는 손님들은 그 옛날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30~40대가 대부분이다. 어떤 손님은 뮤직박스 앞에서 꼼짝 않고 몇 분이나 서 있다가 눈물까지 흘렸단다. 장씨는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추억을 모두 쏟아내며 기뻐했던 그 손님을 보면서 이 일을 고집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에게 '아날로그'적인 고집을 꺾지 않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로 남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아날로그 음악을 전하면서 디지털(인터넷을 통해) 쪽으로 광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물어물어 찾아오는 손님들이 진짜 단골이 되니까요. 저는 그 정도면 족합니다. 옛것은 옛것으로 남아 있을 필요도 있구요. 가끔 젊었을 때 DJ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며 마이크 잡게 해달라고 하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웃음) 물론 그렇게 해드리지요." @IMG4@오늘도 <비땅>의 턴테이블은 돌아간다 "요즘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명이 너무 짧아요." 요즘 가수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혹독했다. 즐기기 위한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동적이고 순간에만 집착한다고 아쉬워했다. 가끔 젊은이들이 <비땅>을 찾기도 하지만 오래 있지 못하고 자리를 뜬단다.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너무 아쉽다고. 그는 음악다방이 우리나라 70, 8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문화의 한 획이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젊은이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어느덧, 기자와 마주 했던 두 시간여가 훌쩍 가고 저녁 8시가 되자 지난 30여 년 동안 그랬듯 그는 LP판이 가득한 뮤직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턴테이블에 판을 걸고 마이크를 당기며 '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낮은 톤으로 마치 속삭이듯, 그 옛날 그 다방에서 그랬듯.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 요즘 모두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사이 음악), 지금 좋은 분들과 함께 하고 계신가요? 여러분 어깨에 걸린 묵직한 삶의 무게, 그 시절 그 음악으로 덜어 드리겠습니다. (사이 음악) 벌써 신청곡이 들어와 있네요. 12시까지 저, 장민욱이 함께 하겠습니다. 첫 음악은 신나는 곡입니다.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 이어지는 곡은 이승재의 <눈동자>입니다. (전주 시작)."

덧붙이는 글 | 전설 같은 DJ, 장민욱 선생이 소개하는 음악을 만나려면?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상산플라자' 3층 <비땅>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인천시내전철 '임학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택시를 타고 한정식집 '경복궁'에 가자면 모두 압니다(기본요금). 그 바로 옆 건물에 있답니다. ☎ 032-554-7080 ←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통화하기 힘듭니다.

덧붙이는 글 전설 같은 DJ, 장민욱 선생이 소개하는 음악을 만나려면?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상산플라자' 3층 <비땅>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인천시내전철 '임학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택시를 타고 한정식집 '경복궁'에 가자면 모두 압니다(기본요금). 그 바로 옆 건물에 있답니다. ☎ 032-554-7080 ← 오후 여섯시 이전에는 통화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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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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