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들리 미 안보보좌관은 24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동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6월 30일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하는 해들리 보좌관.로이터=연합뉴스
11월 초순에 열린 예정인 5차 6자회담을 앞두고 관련국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의 최고위 관리가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도 북한과 수교할 뜻이 없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24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동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연합뉴스>가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을 인용보도한 것에 따르면, 해들리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핵문제말고도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우려하는 또 다른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또 다른 문제들 중에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프로그램, 대규모 군사병력, 북한 주민들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태도 등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해들리의 발언은 부시 행정부가 6자회담 공동성명을 채택한 이후에도 북미수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완전한 관계정상화는 핵문제 이외에도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 군사력, 인권, 마약 및 위조지폐 문제 등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부시 행정부는 "정상적인"(normal), 혹은 "변형된"(transformed)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북미 양국이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면서, 이러한 강경 입장이 누그러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해들리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도 외교관계 수립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 입장은 북핵 문제 해결의 원칙과 목표에 대해 북한과 미국이 여전히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은 줄곧 "미국과 적대관계가 청산되면 핵무기를 가질 이유가 없다"며, 핵 포기의 조건이자 목표로 북미수교를 제시해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핵문제가 해결되어도 다른 우려 사항들이 해소되지 않으면, 외교관계 정상화가 곤란하다며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경 입장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 포기의 동기를 약화시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상화된, 혹은 변형된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하겠다는 부시의 대북정책 기조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자의적 기준과 필요에 따라 체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의 체제가 개선되고 정상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수교국 가운데에는 미국의 기준에 따르더라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또한 미국 스스로도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유독 북한 등 일부 국가들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여전히 일방주의적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두 번째에 있다. 미국 스스로가 북한의 체제 개선에 근본적인 제약을 가하면서 관계정상화의 조건으로 체제 정상화를 내거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의 비정상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의 적대관계에 있다. 북한이 핵 개발 등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는 근본적인 배경은 대미 억제력 확보에 있다.
북한이 무기와 마약 등의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은 정상적인 무역 관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북한의 안보우려가 해소되고 경제발전 장애물이 제거되면 북한 체제의 개선이 적지 않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북미관계가 정상화될 때 가능하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놀라운 일이 있을 것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 포기에 대한 상응조치로 내놓은 것은 '그림의 떡'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관계정상화는 물론이고, 평화협정 체결,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 평화적 핵이용 등 '근본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선 핵포기' 노선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얻겠다고 하다가 하나도 못 얻을 수도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요구하면서도 그러한 선택을 가능케 하는 환경과 여건 조성에 미온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울러 부시 행정부가 과연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굳이 부시 행정부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핵문제 이외에도 다른 군사 현안 및 인권 문제 등 북한이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그러나 이들 문제는 상호간에 위협감소 조치를 취하고 군축을 통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인권 문제 역시 경제제재 등 북한의 인권 상황을 악화시키는 외부적 요인을 해소하면서 북한에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압박할 것은 압박해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미국의 거의 모든 우려 사항을 해소해줘야 관계정상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하나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다. 자꾸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시키다가는 정작 핵문제마저도 못 풀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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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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