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 덕수궁까지, 행복과 산책하세요

소박한 멋과 운치가 살아 있는 정동-덕수궁 기행

등록 2005.10.25 11:33수정 2005.10.2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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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좀더 나은 경관을 보기 위해 해외여행을 즐기곤 하지만, 조금만 눈길을 돌려 보면 우리나라에는 제법 가볼 만한 곳이 많다. 그 중에서도 도시의 적자를 자처하는 빌딩 숲이 우거진 서울에, 돌 하나 골목 하나마다 역사와 문화의 기운을 간직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정동이다.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내려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경향신문사 옆길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경향신문사가 위치한 곳에서 창덕여중, 이화여고, 예원학교를 지나 정동극장과 정동교회가 마주보는 곳까지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걷다 보면,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도 금세 정리가 되고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게다가 서울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덕수궁에 살짝 발을 들여놓으면, 복잡한 세상사와 결별한 채 잠시나마 진하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돌담길 풍경 : 덕수궁 돌담과 현대식 인도가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이만큼 운치 있는 곳을 찾기란 어렵다.
돌담길 풍경 : 덕수궁 돌담과 현대식 인도가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이만큼 운치 있는 곳을 찾기란 어렵다.이호준
주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서울 외곽이나 지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토요일 오전의 정동 나들이는 그야말로 편안한 휴식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의 명랑한 웃음과 발랄한 기운을 느꼈던지, 덕수궁 돌담 위에서는 참새 가족이 한참을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동의 참새 : 덕수궁 돌담 위에서 구름을 벗삼아 지나가는 이들을 지켜본다. 그들의 조상들도 우리 선인들의 삶을 이렇게 지켜보았으리라.
정동의 참새 : 덕수궁 돌담 위에서 구름을 벗삼아 지나가는 이들을 지켜본다. 그들의 조상들도 우리 선인들의 삶을 이렇게 지켜보았으리라.이호준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어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르면 분위기가 전혀 다른 복잡한 대로가 펼쳐진다.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이 사람들을 바쁘게 맞이하고 엄청나게 많은 차량들이 밀려가듯 어디론가 사라진다. 저만치 앞에는 시청광장이 분수를 뿌려대며 시원하게 마사지를 하고 있다.

그들을 뒤로 하고 덕수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아담한 정원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성큼성큼 걸으면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또한 여유로워진다.

덕수궁 전경 : 하늘을 찌를 듯 뻗어가는 기와 지붕과 정적인 공간, 덕수궁. 이를 시샘하듯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덕수궁 전경 : 하늘을 찌를 듯 뻗어가는 기와 지붕과 정적인 공간, 덕수궁. 이를 시샘하듯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이호준
마침 대한문이 공사 중이라 표지판을 따라 옆으로 돌아 들어갔더니, 붉은색 외벽이 길을 안내하고 이내 천연물감을 들인 듯 예쁘게 단장한 작은 문이 나왔다. 대한문이 건재했다면 아마 탁 트인 함녕전 앞뜰을 먼저 만났을 것이다.

외벽을 쭉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니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기와 아래에는 선녀의 날개옷에서 가져온 것인 양 황홀한 단청이 눈부시게 빛나고, 하나의 두꺼운 벽을 이루고 있는 문 안쪽으로 또 다른 문이 활짝 열리며 반겨 주었다.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 : 문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그 뒤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우리 궁궐이 주는 문의 미학은 언제 봐도 놀랍다.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 : 문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그 뒤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우리 궁궐이 주는 문의 미학은 언제 봐도 놀랍다.이호준
함녕전을 나와 작은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정관헌이 이국적인 풍모로 다가온다. 고종이 다과회를 열기도 하고 음악을 즐기던 이 서양식 건축물은, 석조전과 더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정관헌 또한 함녕전을 비롯한 다른 건축물들과 동일한 채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정관헌의 자태 : 이국적인 건물에 금색과 함께 우리 궁궐의 단청 색상을 입혀 놓아 놀랍도록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관헌의 자태 : 이국적인 건물에 금색과 함께 우리 궁궐의 단청 색상을 입혀 놓아 놀랍도록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이호준
정관헌을 떠나 아래쪽으로 걸어가니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띤 문들이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예쁠까. 기와 중심의 문은 건물을 닮았고, 벽돌 형식의 문은 굴뚝을 닮았다. 이렇게 보면 덕수궁은 정말 뛰어난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자신들이 지닌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영혼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걸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문을 통과해서 바깥으로 나오니 준명당과 즉조당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다리에 기와지붕을 얹어 두 건물을 오갈 수 있도록 했는데, 아기자기한 멋이 선사하는 빼어난 아름다움에 그 아래를 지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다.

석어당 전경 : 나무 느낌을 그대로 살린 현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덕수궁에서 유일한 목조 2층 건물이라는 점보다 현판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현판이 주는 자연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석어당 전경 : 나무 느낌을 그대로 살린 현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덕수궁에서 유일한 목조 2층 건물이라는 점보다 현판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현판이 주는 자연미 때문이 아니었을까?이호준
그 다음에는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목조 2층 건축물로 자리한 석어당을 찾았다. 현판이 다른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었는데, 바탕을 검게 칠하지 않고 나무 느낌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석어당 2층에도 여러 개의 문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모습과, 기와 위에 기와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에서 우리 장인들의 예술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조용한 시간을 보내다가 석조전으로 향했다. 석조전은 서양식으로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왠지 된장 냄새가 나는 그런 건축물이다. 우뚝 솟은 건물의 웅장한 외형이며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을 보면 영락없이 서양식이라 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우리네 자연과 건축물들 사이에 터를 잡아서인지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석조전 : 거대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웅장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이는 건축물이다. 정관헌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이미지를 안겨준다.
석조전 : 거대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웅장하면서도 날렵하게 보이는 건축물이다. 정관헌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이미지를 안겨준다.이호준
석조전 앞 분수대를 가로지르니 왕이 집무를 보는 중화전이 눈에 들어온다. 중화전은 보물 제819호로 지정된 건축물로서 국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곳으로 사실상 덕수궁의 메인 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문무백관들이 자리하는 품위석이 위치해 있다. 곱게 단장한 기와지붕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소박한 멋을 자랑하고, 앞뜰에 자리한 바닥의 돌들은 궁궐을 거쳐 간 수많은 사연들을 소리없이 품어주고 있었다.

중화전 : 건물의 크기에 비해 매우 소박하고 단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 탁 트인 공간에 품위석이 자리하고 있어서 표현하기 힘든 위엄과 권위가 느껴진다.
중화전 : 건물의 크기에 비해 매우 소박하고 단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 탁 트인 공간에 품위석이 자리하고 있어서 표현하기 힘든 위엄과 권위가 느껴진다.이호준
잠깐 쉬어가려고 석조전 앞 분수대 건너편으로 가니 광명문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로 국보 제229호인 보루각 자격루와 신기전기화차, 그리고 흥천사의 범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이들은 원래 각각 다른 곳에 있다가 지금처럼 광명문의 품에 안긴 것이지만, 원래 함께 있었던 것처럼 매우 다정해 보였다.

광명문 아래에 위치한 유물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시계인 보루각 자격루, 흥천사 종, 신기전기화차가 나란히 서 있다.
광명문 아래에 위치한 유물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시계인 보루각 자격루, 흥천사 종, 신기전기화차가 나란히 서 있다.이호준
주변에는 엄청나다고 할 만큼 거대한 주목이 자리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은행나무들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었다. 한 왕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다른 궁궐이 그런 것처럼, 덕수궁의 나무들도 무척이나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하나의 왕조가 문을 닫았지만 생명의 움직임은 여전하듯이, 오늘도 덕수궁은 넉넉한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역사를 맞이한다.

덕수궁의 주목 : 역사의 영광과 아픔을 함께 담아내기 위해서는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웅장한 주목의 자태는 생명의 위엄을 역동적으로 보여주었다.
덕수궁의 주목 : 역사의 영광과 아픔을 함께 담아내기 위해서는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웅장한 주목의 자태는 생명의 위엄을 역동적으로 보여주었다.이호준
정동에서 덕수궁 가는 길. 예스러움이 살아 숨쉬는 이 작고 아담한 공간에서 누린 소박한 가을 여행은, 가족 모두가 그 하루에 대해 감사할 만큼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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