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그 치명적 질병에 대해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읽고

등록 2005.10.25 12:21수정 2005.10.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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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기분의 혼란 상태인데, 불가사의한 고통을 안겨주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춘 지성도 도저히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애매한 증상이다. 그러다보니 극단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게 된다. 일상적인 혼란쯤으로 여기는 가벼운 침울함이나 '기분저하(the blues)'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그것이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윌리엄 스타이런 <보이는 어둠> 中

우리 나라에서 우울증은 오랜 시간 동안 전업주부들의 전유물처럼 오해받아 왔다. 그러나 지난 2월 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을 통해 우울증은 나이, 직업,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개인을 치명적인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종의 질병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대한 경고와 사회적 이해의 수준은 매우 낮은 실정인데, 이는 우울증이라는 질병이 '질병'으로도 인지되지 못하는 척박한 현실을 반영한다.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소피의 선택>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우울증에 관한 그의 회고록 <보이는 어둠>에서 이와 같은 우울증의 적나라한 현실을 솔직하고 슬픈 문체로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이 회고록은 작가 그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우울증에 빠진 채 절망을 경험하다 점차적으로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우울증이 여타의 육체적 질병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그것이 정신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뚜렷한 증상과 그의 완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울증은 마치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주위의 적극적인 협력과 스스로의 치유 의지를 앗아간다.

스타이런의 언급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 그 중에서도 세심한 감정선을 갖고 있는 시인들의 대부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알베르 까뮈를 비롯하여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파울 첼란, 그리고 로맹 가리까지. 이 예술가들은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는데, 우울증이 많은 경우 자살로 이어지는 까닭은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고통은 근대 의학이 설명할 수 있는 범주 바깥에 있기 때문에 고통 받는 자의 '고통'은 몇 배 가중된다.

스타이런은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동정심과 공감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건 바로 우울증이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고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간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아무리 우울증과 관련한 고통을 말로써 설명해내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에게 있어 추상적인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지난 3월 심각하게 자살을 결심했었다. 올해 들어 유별나게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분명 그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방 안에 커튼을 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유서를 치기 시작하는데, 단 한 줄도 제대로 된 문장을 칠 수가 없었다. 마지막 글인만큼 멋드러진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어쩔 수 없다'는 무의지 상태는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당시 나는 정신집중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밥을 먹거나 길을 걸어갈 때 느껴지는 것은 실존하는 내가 아닌 무감각한 근육들의 움직임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은 그저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절실하게 든 생각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커리어, 좋은 직장, 학력, 명예, 부 등의 모든 세속적 가치들이 나에겐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나 썩어가는데 그런 가치들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 절박한 경험 이후로 많은 욕심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안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책이 유의미한 까닭은, 실제 우리 주변에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어 점심시간과 같은 쉬는 시간에 직장 근처 심리 상담소를 자주 찾는다고 한다. 더 이상 우울증을 음지에서 확장시킬 것이 아니라 수면 위로 떠올려야 한다. 우울증에 관한 전반적인 의식의 전환이 없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자살을 막을 수 없다.

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문학동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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