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92회

등록 2005.10.26 09:11수정 2005.10.2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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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접어 든 탓으로 적당한 갈대를 고르기 쉽지 않았다. 새로 자라는 갈대는 아직 단단해지지 않았고, 한 해를 지낸 갈대는 푸석해져 있었다. 상대가 한 둘이 아닌 이상 검으로만 상대하기 어렵다. 최소한 날릴 수 있는 암기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지금 담천의는 손에 든 것이 무엇이든, 나뭇잎이라도 충분한 살상암기로 사용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암기 대용으로 갈대 줄기를 선택한 것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곳에 있을 때 그는 갈대 줄기를 암기처럼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일이 손의 감촉으로 단단한 갈대 줄기를 고르면서 손바닥 정도의 길이로 잘랐다. 사선으로 자른 갈대 줄기는 속이 비어 있었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암기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십여 개의 갈대 줄기를 날카롭게 만들어 소매 안으로 갈무리 했다. 사냥하는데 있어 서두르면 오히려 사냥감에게 당할 수 있다. 준비만큼은 철저히 해야 한다. 그는 뇌리 속으로 이곳의 지형을 다시 더듬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자 서서히 움직였다.

모든 것을 감각에 의지해야 했다. 비는 그쳤지만 어둠과 자욱한 물안개로 인하여 시각(視覺)은 이미 아무 쓸모가 없었다. 청각(聽覺)이란 것도 이런 갈대밭과 습지에서는 의존할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청각에 의존하다가는 상대의 술수에 말려 당하기 쉽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할 때 소리는 유인하는 역할 이외에 아무런 의미를 둘 수 없다. 한 쪽에서 소리로 유인하면서 상대를 움직이게 만들고는 소리 없이 다가와 느끼지도 못하는 가운데 비수를 꽂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명....! 그리고 나무 위 한 명!)

예상했던 대로였다. 은신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지점에 상대는 소리 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래서 지형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내가 상대라면 어디에 은신할까를 생각하면 상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은신하고자 하는 곳에 상대 역시 은신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쪽 방향을 열기 위해서는 삼장(三丈)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은신해 있는 세 인물을 잠재워야 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소리 없이 해치워야 했다. 어둠과 물안개는 그의 친구가 되었지만 허벅지까지 차오른 늪지의 물은 기척 없이 움직일 수 어렵게 만들었다.


늪지의 갈대밭은 잠입과 은신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노리는 상대방 역시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먼저 발견되는 쪽이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움직이면 소리가 나고 물결이 인다. 숨죽이고 최적의 환경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엇보다 필요한 생존조건이었다.

-- 암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위에는 반드시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오 할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고,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오 할을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


은신과 추적술을 가르쳐 준 천교두가 일러 준 말이었다. 지금 담천의에게 있어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은 가랑비와 바람이었다. 바람은 간간이 불었고, 그는 바람에 흔들리며 울부짖는 갈대숲에서 조금씩 이동해 갔다.

일단은 나무 위 한 명이 문제였다. 그를 먼저 처리하지 못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담천의는 안력을 돋우었다. 물안개와 세우(細雨)에 가려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일장 정도 되는 높이의 나무등걸에 몸을 기대어 주위를 살피는 흑의인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흑의인이 움직이는 것은 오직 머리뿐이었다. 그의 머리 움직임에는 규칙이 있었다. 자신이 주시해야할 방원을 정해놓고 좌우로 일정한 방향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무 위를 타고 올라 흑의인을 처리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굳이 살생을 하고픈 마음은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해야 한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부의 수하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경험한 상대의 공격은 위협적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치명적인 살초들이었다.

(세 명을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갈대더미를 머리에 이고 은신해 있는 좌측의 사내와 거리를 좁힌 후 나무 위의 흑의인을 만들어 둔 두 개의 갈대줄기로 해치우고 좌측의 사내를 베어 버림과 동시에 틈을 주지 않고 나머지 한 명을 공격한다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한번 나무 위에 있는 사내의 눈길을 살폈다. 단 한번의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바로 그의 눈길이 이곳을 스쳐지나가는 직후에 그의 귀 밑의 풍지혈(風池穴)과 목부위의 천정혈(天鼎穴)에 갈대줄기를 박아 넣어야 했다.

휘이잉--- 쏴아----

다행히 기다린 기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흑의인의 시선이 그가 있는 위치까지 왔다가 돌려지고 있었다. 갈대숲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담천의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갈대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좌측에 갈대더미를 머리에 이고 물 속에 잠겨있는 사내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면서 검을 쑤셔 넣었다.

"헉---!"

나무 위에 있던 사내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린 것과 담천의의 검극이 은신해 있던 자의 살을 파고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찔렀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담천의는 물을 박차며 이장 정도 떨어진 마지막 한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가 세웠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너무 상대를 경시한 면이 없지 않았다. 안이했고 성급했다.

쇄애액---!

어둠을 뚫고 담천의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기척을 알아챈 상대도 가만히 앉아 당하지는 않았다. 그 자의 입에 물려있던 대롱 속에서 비침이 쏟아져 나왔고, 달려들던 담천의로서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그 자는 급히 좌측으로 비껴가면서 자오정(子午釘)과 은수전(銀袖箭)을 연속적으로 기쾌하게 날리고 있었다.

급히 피한다고는 했지만 몸을 틀은 것만으로는 처음 쏘아졌던 비침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왼쪽 팔뚝 위와 어깨에 뜨끔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검으로 날아오는 자오정과 은수전을 쳐냈다.

타닥--- 툭---!

상대가 그 틈을 이용해 갈대숲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담천의는 신형을 허공에 떠올려 회전하면서 상대를 향해 검을 쏘아갔다.

사--악--

검이 살을 가르는 느낌이 손끝에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갈대 잎으로 선혈이 흩뿌려졌지만 신음소리도 없이 그 자는 갈대숲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분명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음소리 하나 없다는 것은 지독한 고련을 거친 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담천의의 검을 두 번씩이나 피했다는 것은 문제였다.

(심각하군.)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담천의는 그 자를 계속 뒤쫓으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상대도 상대지만 문제는 팔뚝과 어깨에 맞은 비침이었다.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아마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상대가 자신을 노리는 지금 상의를 벗어 비침을 빼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급하게 운기를 하여 독을 왼팔 쪽으로 몰았다. 그리고는 혈도를 짚어 독이 퍼지지 않게 임시로 조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가 다행이었다. 왼팔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검을 쓰는데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스으--- 사사삭--

갈대숲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상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모양이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긴장하고 있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이다.)

그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다. 쉽게 생각할 상대들이 아닌 만큼 신중해져야 했다. 조금 전과 같이 무모한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기습하기 위하여 담천의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그가 상대를 기다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다수의 곤충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으러 움직인다. 하지만 거미는 자신의 영역에 거미줄을 쳐놓고 걸려들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거미는 굶어죽지 않는다. 상대가 많다면 잠시 거미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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