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당신은 미국 가서 살아라?"

야심한 밤, 가정폭력 현장 신고 뒤 겪은 황당한 경험

등록 2005.10.29 19:50수정 2005.10.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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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인 26일, 늦은 밤이었다. 인천 인하대 근처에 살기 때문에 근처 수봉산에 가서 종종 야경을 감상하곤 했던 나는 이날도 이것저것 생각할 겸 수봉산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 풍경을 보면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때 내 뒤편의 도로 가장자리로 둘러쳐진 철제 울타리 너머에서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말이다.

사색을 방해하는 소리에 한편으로는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늦은 밤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불길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계속 잘못했다고 울부짖으며 맞고 있는 듯 '아-, 아-' 비명을 지르는데 중학생 정도의 남자아이 목소리였다.

철제 울타리 쪽으로 걸어가 몸을 바짝 기대어 귀를 기울였지만 잘 들리지 않아 계단 옆 난간쪽으로 뒷걸음질쳐 목을 쭉 빼고 비명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니 공원 근처였다. 경광등이 돌아가는 방범초소와 50여미터쯤 거리에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화장실 입구에 있던 검은색 항공잠바를 입은 40대 정도의 남자분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어두운 숲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그만해요 그만 해. 예? 애 죽겠어요, 죽어."


가까이 다가가 자율방범대원이냐고 물으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비명소리를 듣고 걱정이 돼서 나온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슈퍼 아주머니에게 들은 말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너무 심한 것 같다"고 했다.

남의 가정사니 참견하기가 곤란하긴 했지만 나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저씨, 아래쪽 길까지 비명소리가 들여요. 이제 그만해요!"라고 몇번을 외쳐도 아이의 비명소리와 아버지인 듯한 사람의 훈계소리는 여전했다.


40대 아저씨는 몇 번을 얘길 해도 듣질 않는다며 체념한 듯 걸음을 옮겨 공원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 아저씨에게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그 아저씨는 "예전에 다른 일로 몇 번 신고했다가 오히려 내가 조사받았다"며 꺼렸다.

나도 망설여졌다. 머릿속으로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극단적인 가정교육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됐지만 아들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마침 공원길을 지나던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분도 신고를 한 참이었다.

잠시 후 여경 한 명과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 경찰관이 왔다. 현장에 갔을 때 아버지인 듯한 사람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고 아이는 땅바닥에 웅크려 엎드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남자 경찰관이 신고를 받고 왔다고 하자 아버지(아버지가 맞았다)는 아무 저항 없이 경찰관을 따라 나갔다.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아이를 보니 반바지 차림에 신발끈은 풀어헤쳐져 길게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여경과 우리들이 아이를 불빛이 밝은 화장실 입구로 데려가자 아이는 옆구리를 움츠리면서 무조건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를 연발했다. 그리고는 자꾸 뒷걸음질치며 우리를 경계했다.

몸 상태가 어떤지 보기 위해 여경이 바지 단을 올렸을 때 손이 살갗에 닿았는지 아이는 잠시 비명을 질렀다. 허벅지에는 여러 개의 붉은 줄이 선명했다. 웃옷을 벗겨 왼쪽 갈비뼈를 만지자 움찔했다. 무엇으로 맞았냐고 하니까 몽둥이로 맞았다고 했고 발길질도 당했냐고 하니 그랬단다.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8살짜리 남동생과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보이는 차림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왜 때린 거냐고 물으니 울부짖으며 자기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소년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들이 잘못할 때마다 때린다고 했다.

잠시 후 아버지를 앞세우고 갔던 경찰관이 돌아와 우리에게 "남의 집안일이니 이제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그래도 궁금해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때 남자경찰이 말했다.

그 남자 경찰관은 아이의 몸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거나 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맞았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다짜고자 훈계를 시작했다.

"야 똑바로 서 봐. 너 계속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대답해.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난 지금 상황이 아이를 세워놓고 훈계할 상황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경찰관과 아이의 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폭력이 용서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난 경찰관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너무 심했고 또 일단 아이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병원부터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경찰관은 왜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냐며 날 나무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도 뭘 알고서나 얘기하라며 나를 나무랐고 아이에게 "넌 좀더 맞아야 했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경찰에게 말했다.

"아니,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의 몸 좀 보세요."
"이봐요, 당신이 의사예요. 예? 걔가 어떤 상태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일단 당사자가 아픔을 호소하니까 아이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병원으로 보내야 하잖아요. 그리고 우선 여기 좀 살펴보세요. 갈비뼈에도 손상이 간 것 같아요. 아프다며 자꾸 움츠리잖아요."
"당신이 뭘 아냐구요, 예? 정 그러면 당신이 애 데리고 병원에 가면 될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럼 경찰은 뭐 하러 불렀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다 알아서 하지."

"자식이 무슨 아버지 소유물이에요? 미국에서는 이런 거 폭행죄로 형사처벌 감이에요."
"그럼 당신은 미국 가서 살아요. 그럼 되겠네!"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사람 사는 곳이잖아요!"

내 옆에 있던 두 아저씨도 나와 같은 의견을 내놓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날 보며 "아저씨, 내 새끼 안 죽이니 걱정 말아요"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아이를 무조건 감싸려는 게 아니었다.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는 애가 내 자식이었다면 나도 많이 난감할 것이고 아이의 아버지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구타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나?

만약 시민 세 사람이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 폭행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됐을까. 아이는 자신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사람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가. 이런 것을 가정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경찰청 민원실에 올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경찰청 민원실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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