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 도대체 왜 끊임없이 우나

등록 2005.11.08 08:44수정 2005.11.0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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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시청률과 많은 화제를 낳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하는 <장밋빛 인생>. 왜 갈수록 <장밋빛 인생>은 눈물 전쟁에 기대고, 일부 시청자는 왜 짜증을 내는 것일까? 일단 눈물의 시작은 기대불일치의 억울과 한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근본적으로 드라마 <장밋빛 인생>은 약자의 집단적 피해의식으로 빚어진 한의 '자학 저항'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해 볼 점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우선 맹순이의 인물 성격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이타적인 사람, 이타의 정도를 지나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아이와 남편,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돌진해왔다.

또한 맹순이는 신뢰의 화신이다.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바람을 피우리라고는, 동생이 가족을 외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사기 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 제도의 긍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뛰쳐나가려는 맹영이를 가족주의에 적극 끌어들이려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한 소명의식으로 가족을 부양한다.

반면에 맹순이 주위의 사람은 반대로 이기적이고, 불신하고, 세상을 영악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물론 맹순이의 이타성, 희생성으로 뒤늦게 느끼는 바가 있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질병과 죽음이다.

슐츠(Walter Schulz)의 말대로 죽음이란 매순간 현존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다. 장자같이 죽음에 초연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단순히 막연한 유한성의 인식이 아니라 확정 날짜의 수신은 인생의 끝을 의미한다. 이때서야 드라마의 주인공이건 시청자이건 공통의 심리가 형성된다.

'인생 헛살았다!'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헛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억울(抑鬱)하고 이는 바로 한이 된다. <장밋빛 인생> 같은 드라마는 1회성이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뭉쳐진 억울과 한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이제 관통해서 사용할 개념은 외부에 대한 기대욕구의 좌절이다.


KBS
우선 <장밋빛 인생>같은 드라마는 스스로 한을 지고 가는 주인공의 자학적 죽음으로 끝나야 주위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물론 한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최상진 교수는 한이 있는 사람은 놀이나 해학과 같은 공격허용 상황에서 욕구좌절을 간접적으로 표출하거나 음악이나 문학 속에서 한 정서를 승화시킨다고 했다. 예컨대, 한풀이 굿판, 한(恨) 문학, 유행가, 별신굿, 양주산대놀이 등이 이에 속한다고 했다.


그런데 맹순이가 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울음의 반복이다. 이제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다. 울음은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일 수 있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태반이 이제 신파와는 상관없이 울음바다다. 이규태가 지적하듯이 여기에서 울음은 울어야 약자이고 피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해준다. 누군가에게 보여 준다. 왜 보여주는가?

일종의 응석으로 이것은 다른 이, 외부에게 보여 최소한도의 원하는 바, 욕구를 충족시키려 할 때 나온다. 예를 들어 약자인 어린아이는 자신의 욕구나 요구를 위해 울음을 터트린다. 정신분석학자 마이켈 바린트는 응석을 수동적 애정 희구라고 했다고 한다. 기시다 슈는 응석이 나이에 관계없이 일어난다고 했다.

눈물에 쓴소리할 장사 없다

이런 행동은 능동적인 쟁취가 아니라 수동적인 인식 받기인데 <장밋빛 인생>도 응석의 극대화된 울음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왜 이것이 통할까?

한국 사람들은 강대국, 신분구조, 남녀차별에서 약자에게 동정적이다. 그래서 약자인 사람이 울면 동정하고 같이 운다. 이는 아무리 뻔한 눈물 드라마라 해도 비난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장밋빛 인생>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한 것은 이런 눈물에 쓴소리할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운다. 울면 해결이 되고 인정을 받는다. 같이 울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거나 속죄자가 된다.

<장밋빛 인생>은 이러한 범주에서 울음을 잘 활용하고 있다. 울고 짜고 감정적으로 오버하면 다른 이들에게 주목받을 것처럼, 크리스 라반의 말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군다.

그러나 결국 '너 고생했다. 선하게 살았다'는 인식받기일 뿐이다. 맞대응의 울음은 그것의 인정 표현이다. 이게 무언가. 이러한 수동적 울음과 응석의 인정받기 심리는 <장밋빛 인생>의 놀라운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머무르게 한다.

그래서 집단적 피해의식의 한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 분명 피해의식은 가족제도에서 단순히 남성에게 버림받은 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의 지금까지의 전개 논리라면 맹순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에 대한 평가와 보답을 바라고 산 셈이 되기 때문에 더 문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고 배신과 사기를 치니, 위암으로 하늘은 자신에게 보답하니, 억울해서 한이 된다. 그러나 냉혹하면서 객관적으로 간파한 노자가 말하듯이 자연은 인간에게 관대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 왕자와 같이 삶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우선, 전제인 집단적 피해의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법하다. 여성은 그렇게 맹순이처럼 수동적으로 당하고만 살았는가? 맹순이는 그렇게 억울하고 한스럽기만 해야 할까?

좁혀서 일단 남성-여성 구도로 보자. 어느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모든 것을 쥔 남성에게 수천 년 동안 여성이 당했다고 했다. 물론 남성들은 가해 주체가 추상적인 집단적 피해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페미니즘 상의 지적은 이제 일반적인 상식이다. 상식은 상식일 뿐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상식은 언제나 역설적으로 사고를 가둔다.

여성들은 그렇게 무식하지도, 영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요즘에는 전략적 거래 분업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전통 사회의 교육과 경제권은 철저하게 여성하게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철저하게 따랐다. 또한 정치권력을 남성이 쥐었다고 한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제권에 복속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경제권을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따라 가문의 흥운이 달라졌다. 소설 <토지>의 윤씨 부인과 서희는 단지 비정상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 동양사회 연구분과에서는 동양의 많은 전쟁들이 여성들의 경제적인 요구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최영대 교수의 처녀 귀신이 많은 원인 연구도 이와 관련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생산력을 통해 가정을 이루면서, 사회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처녀 귀신은 이마저도 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므로 가장 원통하고 한이 많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가부장제 논리강화용 드라마?

오늘날은 어떨까? 2004년 7월, KBS1 <아침마당>이 KBS 방송문화연구소에 의뢰해 기혼 남녀 1천19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여성 응답자의 56.2%가 '본인이 경제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답했고, '남편이 행사한다'는 대답은 16.0%에 머물러 주부가 주로 경제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정해진 틀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는지다. 미국의 사회학자 울프는 부부 사이의 권위관계를 남편 우월형, 아내 우위형, 부부 일치형, 부부 자율형으로 나누었다.

부부 자율형은 남편은 남편에게 주어진 영역, 아내는 아내에게 주어진 영역에서 각자가 자신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맹순이의 집은 부부 자율형에 속했다. 미국의 경제권은 대개 남편에게 있는데 비해 한국은 주부에게 있다. 가계의 관리권, 가사의 운영권, 생활방식 결정권, 교육권은 모두 아내의 돈주머니에 따른다. 식사 메뉴, 쇼핑, 아이들의 교제 결정, 과외 특기 교육은 모두 주부에게 있다. 남편은 나중에는 아내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황혼 이혼을 당하면 삶 자체가 아주 곤란해지는데,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닥쳐온 사회 문제다. 갈수록 남성은 가정에서 그 영역을 잃고 있다.

오히려 피해의식과 한은 여성의 직업 결정권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해야 하는 것인데, 맹순이는 그것에 전혀 주목하고 있지 않다. 남편의 바람이 포커스였고 그것이 약하니 위암을 엮었다.

중요한 것은 맹순이가 남편에 관계없이 자신의 영역, 스스로 전업 주부에 만족하고 그것을 변함없이 재생산 해왔다는 점이다. 남편은 오히려 부차적이며 종속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드라마의 '불일치'다. 자신이 자율로 선택한 자신의 영역을 잘 꾸리고 있었다면 남편과 시어머니에 상관없이 맹순이의 삶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의 귀환, 시어머니의 변화, 위암의 향방은 눈물로 반복 강화 효과를 노릴 계제가 아니다. 누구의 뒤늦은 인정으로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하는지에 처음부터 초점을 맞혔다면 응석하기와 받아주기, 인정하기의 소모적인 눈물 전쟁은 필요 없었다. 맹순이의 삶 자체에 대한 의미를 희석시키는 희생 관점이나 억울 함의 관점에서 눈물로 이어가는 짜증 구도는 타당하지 못하다.

맹순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자본주의에서 성별 분업 논리를 말하는 것은 논의의 핵심이 아니다. 경제, 교육권으로 일반화 할 수는 없음에도, 알 수 없는 집단적 피해의식은 결국 맹순이와 같이 여성의 '능동성' '적극적 위치'를 오히려 보지 못하고 삶을 의미 없었던 것으로, 수동적 공격성을 증가시키거나, 자학의 결말을 통해 자기 혹은 여성을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다.

거꾸로 남성의 사랑을 받고, 가족에 대한 여성의 희생을 인정해주어야 주부가 의미가 있다는 식의 역설적인 가부장제 논리 강화용 드라마 아닌가. <장밋빛 인생>도 한을 울음이라는 수동적 응석-인식 받기로 도배질하다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처리해버리고, 약자가 남기는 교훈쯤을 던져주고 말일인가 되물어야 한다. 고생-암-죽음으로 펼치는 '세상'에 대한 '자학 저항'은 드라마로는 눈물샘을 자극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큰 비극이며 이제는 현실성이 떨어지기까지 하다.

집단적 피해의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주부들의 암에 대한 불안 자극을 통한 약자에 대한 심정적 동정이 자학적 수동화라는 문제점에 닿은 것은 드라마 상품 구조를 생각할 때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자칫 시청률의 지배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지배질서를 위해 일제가 한의 자학적 수동적 심리를 악용한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gonews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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