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펄은 살아 있다!

등록 2005.11.17 16:36수정 2005.11.18 09:36
0
원고료로 응원
개펄은 또 하나의 우주나 다름없다
개펄은 또 하나의 우주나 다름없다유근종
몇 년 전 TV다큐멘터리로 방영된 <개펄은 살아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순천만은 내게 미지의 세계로 자리매김했다. 그 순천만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대로 친구와 길을 나섰다.

대대포구에서 본 낙조
대대포구에서 본 낙조유근종
흔히 순천만하면 S자곡선의 물길과 노을, 춤추는 황금빛 갈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순천만에 갈대와 S자곡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온갖 풍성함을 제공하는 개펄이 있기에 순천만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순천만은 약 40Km의 해안선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4.4평방Km의 갈대밭은 국내 최대 규모이며 염습지가 있어서 희귀 조류와 200여 종의 조류들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寶庫)다.

지난 2000년 초, 마산에 있는 어린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순천만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중 큰애 정은이는 아주 어릴 적 기찻길 옆 아파트에 살아서인지 "오빠야! 기차여행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덕에 모처럼 차를 놔두고 진주에서 순천 가는 기차를 탄 적이 있다.

철새공부도 시킬 겸 데려간 그 때가 한겨울이라 어린 동생들을 무척 고생시킨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적잖이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 때 찾아간 곳이 갈대와 철새로 유명한 대대포구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은 춥고 철새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차라리 개펄이 있는 와온으로 갈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추위를 동생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떠올린다.

자연이 그리는 그림
자연이 그리는 그림유근종
그러다 순천만에 또 가게 되었는데 그 때는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였다. 느닷없이 친구가 순천만의 새 발자국을 찍으러 가자는 말에 따라 나선 것이 와온(臥溫)해변을 자주 찾게 한 계기가 되었다. 누울 臥에 따뜻할 溫이라는 지명처럼 따스한 해변이라면 나만의 생각일까? 여기 오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진다.

저 멀리 바닷물이 빠져나간 광경은 시간이 멈춰진 또 다른 세상이다. 단지 멈춰진 그림 속에 뻘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분주함만 존재할 뿐이다. 와온에서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해넘이와 노을이다.


나희덕 시인은 '와온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와온해변의 일몰 직후
와온해변의 일몰 직후유근종
나 역시 시인처럼 해를 훔치고 노을을 훔쳤다. 내 눈 속으로 내 사진 속으로…….


다시 찾은 와온은 때를 잘 맞춰 갔는지 물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솔섬 풍경
저 멀리 보이는 솔섬 풍경유근종
와온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솔섬은 내 사진에 단골로 등장한다. 사실 솔섬이라는 이름은 해안마을 어디를 가나 있는 섬의 이름이다. 이를테면 고유명사라는 개념보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와온에서는 이 솔섬을 상(床)섬이라고 하는데 밥상 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이렇게 불린다는 이 마을 양재학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와온마을의 양재학 할아버지
와온마을의 양재학 할아버지유근종
해마다 가을이면 개펄에서 아주 붉은 염생식물을 만날 수 있는데 칠면초라는 식물이다. 칠면초를 보면 항상 영화 <취화선>이 생각난다. 극중 장승업이 개펄을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붉은 양탄자를 바다위에 깔아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하게 아름다웠다.

가장 대표적인 염생식물 칠면초
가장 대표적인 염생식물 칠면초유근종
칠면초는 한 해 일곱 번 색이 변한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붉은 색은 그러고 보면 늦가을에 해당하는 색이다. 칠면초를 이 동네에선 개초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나라가 한참 궁핍하던 시절 이 칠면초를 쪄서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심한 변비가 생겨 고생하기도 했다는 양재학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릴 적 어른들께 들은 얘기가 문득 생각났다.

산골에서는 궁핍하던 시절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흰 속살을 먹었다는 것이다. 정말 어렵고 힘든 시기 바닷가 마을에서는 바다를 매개로 산골마을에서는 산을 매개로 살아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뭐든 많고 너무 흔한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린 어쩌면 정작 소중한 것들을 점점 잃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와온에서 나오는 길, 꼭 멈춰 선 풍경같다.
와온에서 나오는 길, 꼭 멈춰 선 풍경같다.유근종
친구와 난 순천만의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벌교 가는 쪽으로 차를 돌려서 화포(花浦)로 향했다. 화포의 원래 이름은 '쇠리'인데 화포마을의 형상이 소('쇠'는 그 지방 사투리)의 형상이라 그렇게 불렀다 한다.

요즈음은 쇠리보다는 화포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곳곳에 쇠리라는 글자들이 보였다. 지금의 이름 화포는 봄이면 꽃들이 만발하는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뜻에서 화포라고 불린다고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한 화포마을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한 화포마을유근종
지난 봄 처가에 다녀오는 길에 화포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친구와 이번에 다시 들렀다. 조금 전 들렀던 와온에서는 물이 빠져 있었는데 화포에는 물이 꽤 많이 차 있었다.

화포는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3km 밖까지 뻘이 드러나 여느 포구들처럼 큰 배들이 정박할 수 없다. 해변에는 포구 대신 70여 년 전 처음 만들기 시작해 수차례 보수공사를 거쳤다는 방파제만 놓여 있는데 이것이 포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랜만에 들른 화포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하늘 빛과 바다 빛이 같은 색인 경우는 드문데 그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했다. 오후의 포구에서 오랜만에 한가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가 화포를 더 아늑한 포구로 그려가고 있었다. 간간이 떠있는 섬과 섬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 속 깊이 마셔보면서 늦은 오후 포구에서 온몸으로 여유를 느껴봤다.

화포마을의 평화로운 오후
화포마을의 평화로운 오후유근종
돌아오는 내내 화포의 흑백사진같은 풍경이 잊혀지지 않았다. 꽃 피는 봄이 오면 화포라는 그 이름을 제대로 만끽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 다시 오기로 마음 속에 작은 약속을 했다. 순천만의 낙조를 뒤로 한 채 내년 봄을 기약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와온마을 :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여수 방면 우회도로) → 순천 시내 → 17번 국도 월전 사거리(863번지방도, 우회전) → 중흥, 해창, 선학, 상내 경유 
· 화포마을 : 호남고속도로 순천IC(벌교, 보성방면) → 별량면 상림 쪽 좌회전 후 5분 정도 직진 → 화포마을
 순천에서 화포까지 가는 시내버스(81번, 82번)가 하루 10여회 운행

해마다 11월 초순에 순천만에서는 갈대축제를 한다. 주변 볼거리로는 송광사와 선암사, 고인돌 공원을 들 수 있다.

기타 더 자세한 사항은 순천시 홈페이지(http://www.suncheon.jeonnam.kr/)를 참고.

덧붙이는 글 찾아가는 길

· 와온마을 :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여수 방면 우회도로) → 순천 시내 → 17번 국도 월전 사거리(863번지방도, 우회전) → 중흥, 해창, 선학, 상내 경유 
· 화포마을 : 호남고속도로 순천IC(벌교, 보성방면) → 별량면 상림 쪽 좌회전 후 5분 정도 직진 → 화포마을
 순천에서 화포까지 가는 시내버스(81번, 82번)가 하루 10여회 운행

해마다 11월 초순에 순천만에서는 갈대축제를 한다. 주변 볼거리로는 송광사와 선암사, 고인돌 공원을 들 수 있다.

기타 더 자세한 사항은 순천시 홈페이지(http://www.suncheon.jeonnam.kr/)를 참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95년 경상대학교 러시아학과에 입학했고,지난 1998년과 1999년 여름 러시아를 다녀와서 2000년 졸업 뒤 사진전 "러시아 1999"를 열었으며 2000년 7월부터 2001년 추석전까지 러시아에 머물다 왔습니다. 1년간 머무르면서 50여회의 음악회를 다녀왔으며 주 관심분야는 음악과 사진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2. 2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3. 3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4. 4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5. 5 팔순잔치 쓰레기 어쩔 거야? 시골 어르신들의 '다툼' 팔순잔치 쓰레기 어쩔 거야? 시골 어르신들의 '다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