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아직도 거기 서 있었습니다

세월이 약일까요?... 정리와 상처는 다른 것인가 봅니다

등록 2005.11.17 14:00수정 2005.11.1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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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살 거 아님 입이라도 좀 닫지, 남, 열 불나 죽겄는데!"


듣다 못한 배추장사가, 아니 이젠 할머니 티가 완연한 내 여고 선배가 한마디 합니다. 그러자 '이건 넘 짧고 요건 넘 통통하고 요건 갓이 넘 두껍고' 어쩌고 하면서, 배추 단들을 저 밑에서 빼내 보기도 하고 이 단 저 단들을 함부로 들었다 놨다, 그때마다 으처진 이파리 조각들을 떨어트리면서 배추를 고르던 젊은 여자가 배추 단을 탁 놓더니 두 눈을 똥그랗게 떴습니다.

"누가 안 산데요? 고르는 중이잖아요! 기가 막혀, 여기밖에 없나!"

젊은 여자는 바로 앞에 세워 둔 승용차를 타고 휭 사라졌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여자는 배추를 전혀 볼 줄을 모릅니다. 상품 중에 상품인 배추들을 그야말로 몰라보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 여자는 배추를 볼 줄을 모르는 게 아니라 배추가 워낙 비싸니까 욕심껏 통이 큰 것을 고르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돌아봅니다.

"사간 지 며칠 안 됐잖아?"
"딸애가 겉절이가 먹고 싶대서, 한 단만 줘. 오늘도 모두 장미 무늬네."
"또 나간다더니 아직 안 나갔나보네. 나이가 있는데 시집을 가야지, 외국생활만 하다니. 너도 딸 땜에 참 속상 하겄다."

선배는 앞 배추더미에서 방금 그 여자가 탁 놓고 간 그 배추 단을 집어 듭니다. 선배가 생각하고 있듯이 내 눈에도 배추들이 모두 똑 같아 보였습니다. 알맞게 통통하면서도 배추 기장이 적당했고 또 이파리들이 쪼글쪼글 한 게 폭 폭 여며져 있는 끝 모양이 아름다운 장미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아삭아삭 아주 맛있습니다. 비싼 게 흠입니다. 두 포기를 묶은 한 단에 사천 원.


a 장미 무늬 입니다

장미 무늬 입니다 ⓒ 김관숙

뉴스대로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되면서 더욱 중국산 김치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국내산 배추 값이 바짝 올랐다가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배추 값이 금값인지라 요즘은 뻣뻣한 겉 이파리까지 다 먹고 삽니다. 선배가 배추다발이 든 푸른 비닐봉지를 내 앞에 놓고 돈을 받아서는 일명 소시지바지 허리에 찬 깊은 주머니에 넣더니 하얀 무 단 더미 위에 먹다가 둔 쑥 개떡을 집어 쭉 찢어서는 "먹어 볼래?" 합니다.

나는 좀 놀랐습니다. 친숙한 사이라 해도 그렇지 배추 단들을 다루던 그 구저분한 손으로, 그것도 먹다가 둔, 먹던 입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나 있는 개떡을 쭉 찢어서 내게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나는 그걸 받았습니다. 그런데 쑥 향기가 기가 막혔습니다. 쑥을 곱게 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칼로 두어 번 툭 툭 치듯이 썰어서 밀가루에 막 버무려 반죽을 해 쪘습니다. 하긴 그렇게 반죽을 해서 만든 것이 더 구수합니다.


위생이야 어쨌든 간에 나는 쑥 향기에 끌려서는 그만 순식간에 다 먹어 버립니다. 다 먹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쓰윽 닦고 있는데 아주 깔끔한 모습의 중년 여자가 와서 나를 보고 배추가 참 좋다고 하면서 한 단에 얼마냐고 묻습니다. 나는 선배를 돌아봅니다. 선배는 이쪽을 모른 체 하면서 손님과 서너 단이 남은 알타리를 흥정중입니다. 떨이라 손님이 막 깎으려고 합니다. 선배는 고자세입니다.

"얼마냐니깐요? "
할 수 없이 나는 배추장사를 합니다.
"사천 원이에요."
"다섯 단만 줘요, 저기 저 차거든요."

내가 졸지에 배추장사가 된 건 스포츠 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 쓴 탓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세련되지 못한 원래의 촌스러운 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손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고 돌아섭니다. 선배는 떨이한 알타리들을 부지런히 푸른 비닐봉지에 넣고 있습니다. 나는 선배에게 방금 받은 배추 값을 건네고 나서 배추들을 비닐봉지에 넣어 그 여자의 승용차까지 두 번에 걸쳐 가져다줍니다. 선배도 그 무거운 알타리들을 담은 비닐봉지를 번쩍 들어 안고는 손님 승용차까지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내가 산 배추가 든 비닐봉지를 집어 들고 내 승용차로 돌아와 뒷좌석에다 던져 넣고는 승용차 문을 막 닫고 났는데 저만큼에서 아까 그 여자가 까만 고급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서는 "이 봐요오"하고 부릅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흔들고 있습니다. 연분홍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합니다.

"대파 두 단, 생강 반 근만 줘요."

노상에 배추장터입니다. 배추더미들이 줄지어 있는 사이사이에 양념거리들도 있습니다. 선배네 배추더미 옆에도 양념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주인이 다릅니다. 그 여잔 그 양념거리들이 같은 집 물건으로 착각을 한 듯합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쁩니다. 나를 장사꾼 취급을 해서가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그것도 가정주부가 운전대 앞에 앉아서는 만 원짜리를 흔드는 꼴이 이건 아니다 싶은 것입니다.

선배는 아마 이런 경우를 밥 먹듯이 당했을 것입니다. 힐끗 보니까 나보다 더 흰 머리가 많은 선배는 작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마시며 먹다 만 쑥 개떡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때를 놓쳐도 한참이나 놓친 점심인 모양입니다. 나는 순순히 양념거리 심부름꾼으로 나섰습니다.

a 탐스럽습니다

탐스럽습니다 ⓒ 김관숙

작년 가을에 배추장사가 된 여고 선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선배가 창피해 할까봐 의식적으로 선배를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한눈에 알아본 선배가 "야, 나야 나"하고 괄괄한 목소리로 부르면서 뛰어 와서는 내 두 손을 꽉 잡고 막 흔들어댔습니다. "사는 게 뭔지, 우리, 삼십 후반부터 못 봤지 아마"하면서. 그런 선배의 눈에는 눈물이 다 비쳤습니다. 나도 눈물이 났습니다.

전차가 다니던 그 시절, 땅 부잣집 고명딸인 선배는 예쁘고 여린 여자였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고 있던 남자친구가 자취를 하던 월세방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대학 2학년이던 선배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벌판을 파랗게 덮었던 배추들이 몽땅 도매상인에게 팔리던 날 밤에 부모 몰래 돈뭉치들을 꿍쳤습니다. 그 다음 날로 선배 남자친구는 선배에게조차 온다 간단 말도 없이 행방을 싹 감춰버렸습니다.

"커피 줄까?"
"아니, 나 커피 안 먹어. 이제야 손님이 뜸 하네."
"난 등짝이랑 허리가 욱신거릴 땐 이걸 마셔야 해. 해로운 줄 알면서도 말야. 옛날에 아버지한테 무지 맞았잖냐, 후유증인가봐."

선배가 먼저 옛날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동안 나는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왜 하필 그 나이에 젊은 남자들도 힘들어하고 또 첫사랑과도 연관이 있는 배추장사를 하는 건지, 첫사랑 소식은 영영 없었던 건지 등인데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선배 쪽에서 피하는 눈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배가 먼저 얘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비로소 나는 입이 떨어집니다.

"근데 왜 하필 배추장살 해? 형부 퇴직금도 만만찮을 텐데 말야."
"친정아버지가 배추밭을 주셨거든. 그때 골방에 갇혀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아버지 약 올리느라고 대학 때려쳤잖냐, 철도 참 없었지. 그런데다 아버지가 중매한 월급쟁이랑 사는 게 그냥 저냥 이잖냐. 미국유학 보낸 아들 놈 학비도 만만찮은데 말야. 그 모든 것들이 맘에 걸리셨는지 몇 년 전에 배추밭 벌판을 내게 주시더라."

"야아, 언니 재벌이네! 재버얼!"
"배추도 이걸로 끝야. 이 참에 괜찮은 도매꾼을 만난 데다 땅이 팔렸어."

"잘됐네, 배추 장사 면하게 돼서!"
"이젠 친정아버지 말씀대로 보신도 하고 슬슬 남편이랑 비행기 타고 여행도 다니고 그래야겠다. 앞으로 너, 나 보기 힘 들 거다. 참, 나 그 개 같은 자식 소식 듣고 산다."

"정말?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
"땅이 팔리니까 비로소 맘 정리가 되더라. 이젠 편하게 말 할 수 있어."

"근데 뭐가 됐는데?"
"되긴 뭐가 돼? 올곧지 않은 눔이 뭐 되는 거 봤니? 이혼 두 번 하고 자식도 없이, 떠돌며 산다더라."

그러나 커피를 마시고 난 종이컵을 그대로 힘주어 우그려서 쓰레기 봉지에 넣는 선배의 잔주름이 진 두 눈에는 안개 같은 것이 어려 듭니다. 정리와 상처는 다른 것인가 봅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배의 상처는 하도 깊고 깊어서 세월이, 그 수십 년의 세월이, 깜짝 놀라다 못해 멀찍이 피해 흘러 간 듯싶습니다.

우그린 종이컵을 버리고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급히 돌아서던 선배의 팔꿈치가 배추더미를 건드렸습니다. 그 바람에 맨 위에 배추다발 하나가 떨어집니다. 선배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으려다가 말고 벌떡 몸을 세우더니 온 힘을 다해 오른 발로 콱 콱 연달아 배추다발을 밟아 댔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선배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개 같은 자식, 개 같은 자식으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마침 손님이 와서 배추 값을 묻고 있습니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님 앞으로 갑니다. 나는 그 틈에 얼른 선배가 밟아댄 반 으쳐진 배추 다발을 추슬러서 푸른 비닐봉지에 담습니다. 이 비싼 배추다발은 내 몫입니다. 선배 눈에는 그 개 같은 자식의 시체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값 비싼 푸른 배추다발입니다. 손님이 배추 값만 물어보고 그냥 가버리자 선배가 그런 나를 돌아봅니다.

"야아, 그 건 말야 푸욱 삶아 나물로, 새우젓 넣고 들기름에 볶아 먹어야 한당!"
"알았다 궁! 아주 딸딸 볶아 신물이 나도록 꼭꼭 씹어 먹어 줄 껭!"

선배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립니다. 나도 웃음이 터졌습니다. 내 승용차로 돌아와서 선배를 돌아봅니다. 배추더미도 아름답고 한결 밝아진 환한 모습으로 손님과 배추 흥정을 하고 있는 선배의 모습도 유별나게 아름답습니다. 한 폭의 푸른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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