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대안은 '개방적 지역주의'"

[서평] 앤드류 갬블 <정치와 운명>을 읽고

등록 2005.11.18 15:35수정 2005.11.1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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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력
오늘날 우리는 유례없는 '정치 과잉의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 일상을 침식해 들어오는 각종 정치적 이슈들을 공기처럼 호흡하며 살고 있다.

정치 과잉은 필연적으로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를 낳게 마련. 이미 우리 주위엔 살풍경한 냉소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현상은 동시다발적으로 지구촌에 범람해 급기야 지구 반대편 유럽의 한 정치학자로 하여금 정치 냉소주의에 제동을 걸기 위한 작업에 착수토록 했다.


앤드류 갬블은 이미 1974년부터 저술 활동을 시작한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로, 이 책 <정치와 운명>(2000)은 그의 근간(近刊)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 냉소주의에 빠진 현대인을 위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공간의 활성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그가 진단하는 오늘날 정치 상황은 비관론과 낙관론이 공존하는 전환기다. 특히 그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정치의 종말론'을 강력히 부인하며, 오히려 정치의 필연성과 영속성을 역설한다.

그는 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네 가지 종말론을 하나씩 비판하는데, 첫째가 역사의 종말, 둘째가 민족 국가의 종말, 셋째가 권위의 종말, 넷째가 공적 영역의 종말이다. 얼핏 보면 우리 일상과 무관해 보이는 용어들이지만, 알고 보면 이미 우리의 인식권 안에 상주해 있는 개념들이다.

첫째 역사의 종말이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한다. 앤드류 갬블은 "역사의 종말"이란 용어를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강력히 비난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했던 다니엘 벨의 견해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앤드류 갬블의 시야에 포착된 세계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천착하고 있으며,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데올로기의 기치 아래 더욱 강고한 세력들이 집결하고 있다. 그가 지목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결이 종식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독주"현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결 구도의 본질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에 있지 않고, 상대 체제에 대한 '대안 제시'에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대결 구도 하에서 승리를 쟁취하기에만 급급해 피차 대안을 모색할 기회를 살리지 못함으로써 비록 자본주의의 판정승이란 형식상의 귀결에도 불구하고 그 속사정은 공멸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인식이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두 번째 종말론, 즉 '민족 국가의 종말'은 다름 아닌 세계화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결이 막을 내리고 인류가 맞이한 세계는 바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기치 아래 결속을 강요받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겉으론 자유와 평등이 충만하지만, 그 이면엔 양극화와 불평등이 난무하는 세계다.

격화된 세계 경쟁의 시대에 "절하 경쟁(race to the bottom)"이 조장됨으로써 사회 민주주의 정권의 토대가 침식당한 것은 자본 축적의 과정이 보여 주는 일반적인 경향이 불균등할 뿐만 아니라 사회 양극화와 사회적 배제의 심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로 종종 거론된다. 고도로 숙련되고 매우 안정된 경제 부문에 진입하지 못하는 과잉 인구가 생겨나는데, 이들은 모두 국외자로 방치되거나 저임금 서비스 직종에 고용된다. 세계 시장에서 빈부의 차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강고하며, 지역 간 ·국가 간의 격차 그리고 한 국가 안에서도 부문 간 ·집단 간의 격차가 메워지지 못한 채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와 운명>, p.168)


아울러 저자는 세계화의 대안으로 '개방적 지역주의'를 제안한다. 기존의 폐쇄적 지역주의보다 덜 배타적인 개방적 지역주의를 구축해 상호 협력과 토론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의혹이 짙은 안개처럼 스며 있는데, 마침 부산 APEC 회의와 맞물려 시의 적절한 화두를 던져주는 듯해 기이하고도 반가운 느낌이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향한 의혹의 시선을 견지하면서도, 그 대안을 정치 외적인 공간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기존의 정치적 공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무책임한 정치 냉소주의야말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날개를 달아주는 방임적 태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앤드류 갬블의 <정치와 운명>이 제안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극복 방안은 우회 전술이 아닌 정공법으로 요약된다.

정치와 운명 - 21세기를 위한 주제 1

앤드류 갬블 지음, 김준수 옮김,
울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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