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향기 나는 유년 시절로 떠나는 여행

[어른도 함께 읽는 동화⑤] 강병철의 <닭니>를 읽고

등록 2005.11.18 15:10수정 2005.11.1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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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병철 <닭니> 겉그림

강병철 <닭니> 겉그림 ⓒ 푸른나무

사람은 '현재'의 삶에 불만이 있으면 습관처럼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힘들고 고단한 오늘과 당당히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회귀 본능은 오히려 인간의 현실극복 능력을 저하시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추억을 꺼내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순 없어도 최소한의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우리네 팍팍한 삶에 이러한 유년의 기억조차 없다면 우리의 하루는 얼마나 더 아프고 건조해질까?


강병철의 <닭니>는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풍경과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배가 불렀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가슴을 치고 코끝이 짠하게 맵다. 우리는 분명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빌딩 숲 너머 멀리 흙냄새를 맡고 싶은 것이다.

주인공 강철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새롭다. 어린시절에 보고 들은 것들이란 그 감각의 '처음'과 맞닿아 있기에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강철이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돌멩이를 묶어 하늘로 높이 던지는 것을 보면서도 '하늘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돌멩이가 뚫고 가는 겨울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고 느낀다. 유년의 감수성이 아니고서야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이다.

이후로도 강철이의 독백에는 보석 같은 감각들이 살아 숨쉰다. '나는 장님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라든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슴을 적시더니 처음으로 사람대우를 받는 것 같아 등허리까지 따뜻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에는 풋내 가득한 설렘이 묻어 있다.

첫사랑의 기억이 그러하듯 세상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것들이 주인공 강철이의 가슴에는 더없이 깊숙이 박힌다. 흙탕물도 아름다울 수 있고, 선생님도 슬프면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노래가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강철이는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눈을 뜬다.

흙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아주 작은 벌레에서부터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나'처럼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주인공 강철이와 아이들 역시 이러한 것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며 성장한다.


학교에서 쥐꼬리를 잘라오라는 말에도 아이들은 가슴을 졸인다. 부모님이 쥐를 잡아 죽일 때면 강철이는 자신의 심장이 '푹' 터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 쥐들의 꼬리를 차마 자르지 못한 강철이는 쥐꼬리 대신 오징어 다리를 물에 불려 제출한다. 선생님은 그런 강철을 꾸중하고 손바닥을 때린다. 하지만 강철이는 그 아픔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니 오히려 행복해 한다. 회초리 몇 대로 생명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이랄까?

"나는 손바닥 세 대를 맞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맞으면서도 아기 생쥐의 쥐꼬리를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직도 모른다. 막고 나니 몸으로 때웠다는 생각뿐." (본문 중)


새끼 쥐의 꼬리를 자르지 못한 강철이는 어린 병아리를 공격하는 어미 닭들에게도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놓는다. 그 덕분에 온몸에는 사람의 이보다 더 지독하다는 닭니가 옮아버렸다. 할머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박박 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강철이는 어린 병아리 걱정뿐이다. 작은 생명을 위해 자신의 아픔을 감수하려는 강철이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재를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가 흙에서 자라면서 배웠던 것들이 왜 지금은 너무 쉽게 잊혀지고 있는지….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가장 그리운 이유는 아마도 이웃끼리 주고받은 따뜻한 '정' 때문일 게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지금 많은 현대인들은 이웃을 잃어버렸고, 또 그 사이에 나누는 '정'을 잃어버렸다. 이 동화책 속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어느 날 길에서 십 원짜리 지폐를 줍게 된 강철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돈을 접어 궤짝 밑에 숨겨 놓는다. 그리고는 통장에 저금해서 이자를 불릴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데 친구 성모가 다리를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철이는 숨겨놓았던 지폐를 꺼내어 아픈 친구를 위해 라면을 산다. 친구에게 기꺼이 라면을 건네주는 강철이의 따뜻한 마음씨! 그게 바로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잃어버리지 않은 소중한 보물이었다. 내 이웃의 아픔을 내 것인 양 아파할 수 있었던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시절이 그리워하는 진짜 이유이리라.

말벌떼가 민구네 꿀벌통을 공격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힘을 합친다. 왕탱이 벌에게 쏘인 강철이는 쓰러지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함께 뭉친 싸움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왔다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밝게 보였다니!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내 일이 아니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신속하게 자리를 피해 버리는 요즘 우리의 세태가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 동화책 속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에게 돌팔매를 던지며 즐거워하는 철없는 아이들의 행동에는 어느덧 악의 본성이 스며 있는 듯했다. 또한 6학년 전체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데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도지사상을 빼앗기고 만 연화의 사연은 어른들의 부조리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따뜻함뿐 아니라 슬픔과 부조리한 것들 속에서 주인공 강철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조약돌이 되고 싶었다. 개나리 울타리 밑으로 민들레 새순들이 뽀드득뽀드득 굳은 땅을 헤집고 있었다. 내일부터 우리는 6학년이 될 것이다." (본문 중)

닭니 - 흙 향기 묻어 있는 알토란 같은 어린 시절 이야기

강병철 지음, studio 돌 그림,
푸른나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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