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15회

등록 2005.11.28 08:18수정 2005.11.2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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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보의 보주인 독고문은 어지러운 생각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결국 뒤척이다가 다시 일어나 탁자에서 찻잔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겼다.

술시(戌時)에 시작된 적들의 두 번째 기습은 예상 외로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적들은 구파일방이 주축이 된 이진(二陣)을 공격해 왔는데 이미 예상되었던 기습이라 당황하지 않고 방어에 주력했다.


그 사이 일진에 있던 무림세가의 고수들이 기습해 온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적들은 이십 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순식간에 물러났던 것이다. 허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들의 기습이 아니었다.

(구양휘…! 멀지 않은 장래에 중원은 그의 것이 되겠어.)

탐이 났다. 독고문으로서는 정말 탐이 나는 인물이 있다면 구양휘였다. 적들 사이를 누비며 거칠 것 없는 공격을 퍼붓는 그는 늑대들 사이에 포효하는 한 마리의 사자였다. 그는 인정을 두지 않고 가차 없이 베었다. 이런 집단적인 혈투에서 그런 인물은 반드시 필요했다. 상대의 사기를 일순간에 꺾어 놓고, 상대의 진영을 흩으려 놓는 절대고수.

그의 검은 빠르고 정교했으며 예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검이 무서운 것은 모든 것을 부셔버리는 위맹함이었다. 그의 진력이 실린 검에 부닥치는 상대의 병기는 채 삼초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나갔다.

게다가 그의 옆에 있던 인물들은 어떤가? 광도라 했던가? 구양휘와 비슷한 덩치를 가진 인물은 마치 쇠꼬챙이 같은 도로 섬광을 뿜으며 적들을 혼비백산하게 하지 않았던가? 팽악과 소림의 혜청이란 인물 역시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그들 몇 명의 활약으로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고문의 뇌리로 독고상천의 모습이 떠올랐다.

(본 보는 너무 폐쇄적이었어. 그 아이 역시 다른 인물들과 너무 교분이 없었다.)


구양휘의 무위와 그 주위에 있는 인물들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구양휘는 어느새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홀로 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 번쯤 숙고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젓고는 그런 생각을 털어 내는 듯 했다. 정작 그의 잠을 설치게 한 것은 구양휘 문제가 아니었다. 저녁녘에 당도한 육능풍의 전서 때문이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전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연동이라… 아무런 대책 없이 천마곡의 입구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는 전서를 다시 읽었다. 이 천마곡 안과 연결된 연동이라는 비밀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능풍의 전서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제마척사맹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실 지금 독고문의 생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천동의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일까? 왜 육노조는 여후량(呂厚亮)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여후량은 철혈보의 은영전주(隱影殿主)다. 그리고 자신의 누이의 남편, 자신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운영전주라는 자리는 철혈보의 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위치이니만큼 친족이 아니라면 기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믿고 맡겼던 것인데 최근 세 번에 걸친 육능풍의 전서에는 여후량을 의심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만일 여후량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정녕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육능풍과 독고좌, 반당이 자리를 빈 지금 철혈보는 서열사위 무적신창(無敵神鞭) 신철(申鐵)만이 남은 상태. 철혈보 일륜(一輪), 일창(一槍), 일편(一鞭), 일도(一刀) 인 사천주 중 일편(一鞭)이다.

연동의 존재가 여후량을 의심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육능풍은 이 점에 대해 매우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연동의 존재를 몰랐다면 빠져나온 섭장천 일행을 그리 신속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는 점, 또한 천마곡 내의 누군가와 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육능풍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여후량은 정말 연동의 존재를 몰랐던 것일까?)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가 보여준 사소한 것이라도 불신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독고문의 뇌리에 자꾸 여후량에 대한 의심이 솟구쳐 올랐다. 마음 속에서는 애써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자신이 직접 철혈보의 수하들을 이끌고 천마곡에 온 것도 여후량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후량이 건네 준 천마곡에 대한 정보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철혈보의 행사가 완벽했던 것은 치밀한 조사 덕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육노조가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군. 연동도 직접 확인하지 않고 상천을 데리고 보로 돌아가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 여후량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천마곡 내에 갇혀있다시피 한 독고문으로서는 아무리 만반의 사태에 철저히 준비하고 보를 떠나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방책을 세우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외부의 적은 그래도 대비하기 쉽다. 하지만 내부의 적이라면, 더구나 보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가 내부의 적이라면 정말 방비하기 힘든 것이다.

독고문은 힐끗 한 쪽에 대로 만든 조롱(鳥籠)에 있는 두 마리의 해동청(海東靑)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육능풍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는 자신이 사용하는 전서구였다. 육능풍의 전서를 가지고 온 해동청은 여기저기 깃털이 빠져있었고, 상처도 나 있었다.

천마곡으로 날라 들어오다 다른 맹금(猛禽)과 싸운 것 같았다. 몸은 천마곡 안에 있지만 아직 연락이 두절된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아마 적들이 맹금류를 풀어 전서구를 사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약 철혈보마저도 해동청이 아닌 일반적인 비둘기를 전서구로 사용했다면 연락조차 두절되었을 법했다.

그는 탁자 위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일단 육능풍에게 전서를 보내야했다.

-------------

해가 서편으로 넘어간 지 두시진이 지났음에도 주위의 경물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은 이유는 오늘이 보름이기 때문이었다. 떠오른 만월(滿月)이 잠시 구름에 가렸다가 나오면 더욱 밝아지는 것도 같았다.

인적이 드문 야산이었다. 돌산이었는지 주위는 나무보다 바위가 많았고 바닥도 튀어 나온 돌들로 인해 울퉁불퉁 했다.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들 틈으로 무언가 튀어 나올듯한 괴기로움이 느껴졌다. 비틀려 서 있는 나무들의 형상까지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야밤은 고사하고 훤한 대낮이라도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희롱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인영들이 보였다.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한결같이 흑의경장을 걸치고 사립(簑笠)을 쓰고 있었다.

헌데 해괴한 일이었다. 중앙에 네 명이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검은색의 관(棺)이었다. 어둠 속에서 네 명의 인물이 관을 메고 가는 모습은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 양 옆으로 두 인물이 마치 관을 호위하듯 보폭을 맞추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느릿하게 걷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너무나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관을 메고 달리는 상황에서도 마치 자로 잰 듯한 보폭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 일정하고, 한 번 딛을 때마다 일장씩 미끄러지듯 나아가 매우 빨랐다.

게다가 무거운 관을 들었음에도 땅을 딛는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어서 꽤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지친 기색도 없어 보였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 길래 이렇듯 인적이 없는 산 중에, 더구나 어두운 야밤에 관을 메고 달리고 있는 것일까? 간혹 객사한 시신들을 모아 야밤에 매장하는 일도 있었지만 분명 행색으로 보아 이들은 절대 장의(葬儀)가 아니었다.

“……!”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가더니 폐찰(廢刹)처럼 보이는 낡은 건물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 높은 야산은 아니었지만 인적이 드문 이곳에 뎅그러니 지어져 있는 사찰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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