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익위원회'에서 발행한 수험자 보관용 수험표.김수원
나는 잔뜩 열 받아서 시험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늘어놓았다. 동조해 주기를 내심 바랬던 친구는 이 철없는 대학 졸업예정자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래서? 학점 안 딸 거야? 취업 안 할 거냐구! 야, 니가 토익을 안 쳐도 될 정도로 점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냐? 토익 성적 안 보는 데만 원서 넣을래? 학점 제한 없는 곳만 골라서 면접 볼래? 잘나가는 대기업들은 그렇다 쳐도, 아직 영어 면접 볼 형편이 되지 않는 지방의 중·소기업들은 사람 뽑기 편한 그 놈의 점수를 보고 있단 말이야. 정신 좀 차려라!!"
그래, 대학생에게 토익은 마치 군대처럼 피해갈 수 없는 단계였다. 토익 따윈 하찮게 여길 만한 배짱과 뚝심도, 또 든든한 '빽'도 없으니까. 나보다도 점수가 훨씬 높은 내 친구는 여전히 불안하단다. 어학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늘어났다 해도 이러저런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류전형 자격만 더 열어 놓은 것 같고, 그 중 토익 성적이 나쁜 사람은 면접도 못 볼 것만 같단다. 채용에서 각종 신체 조건을 없애도 결국 '준수한 외모'를 뽑는 것처럼 말이다.
토익 900점을 넘고도 취업이 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600점도 안되는 나는 공포에 떨며 '공부'도 아닌 공부에 꾸역꾸역 몰입한다.
| | 전공보다 많이 투자하는 '부전공 토익' | | | 채용에선 무용론 제기, 대학에선 여전히 '대세' | | | |
| | ▲ 한 고등학교의 '3학년 수능 이후 지도계획'. 입시 설명회가 없는 날은 '토익시험준비'로 채워져 있다. | ⓒ김수원 | 최근 인력 채용에 토익시험 무용론이 제기되면서 점차 하한선을 낮추고 가산점을 없애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토익은 여전히 대학에서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고 있다.
애초 토익이 비즈니스 영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대학은 신입학(특별전형), 학점 인정, 졸업 요건, 장학금 지급 등 각종 평가 기준으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토익위원회에 따르면 신입학(특별전형)에 성균관대(900점 이상), 중앙대(900점 이상), 세종대(880점 이상) 등 94개 대학교가 토익을 활용 중이고 그 수는 2000년부터 매년 증가 추세다. 토익 점수만 가지고 학점으로 인정하는 대학교도 경상대(600점 이상), 한양대(760점 이상) 등 30개나 된다.
현재 졸업 요건(필수)으로 전체 또는 일부학과에서 토익을 활용하고 있는 대학교도 전남대(730점 이상), 목원대(800점 이상, 06년도 졸업생부터) 등 41개. 졸업영어시험과 졸업논문으로 토익을 인정(선택)하는 대학교도 인제대(500점 이상), 배재대(700점 이상) 등 19개에 이르며 이들 대학은 낮게는 270점에서 높게는 900점까지 하한선을 두고 있다.
그동안 제도를 마련하지 않았던 서강대도 2008년 졸업생부터 인문계는 900점, 자연계는 800점 이상의 토익점수를 졸업자격요건에 포함할 예정이고 경성대는 내년 신입생부터 토익점수 졸업인증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토익졸업인증제도가 반강제적으로 이뤄지고 토익이 대학교육의 대체수단으로 쓰이다 보니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박모씨는 "이미 취업을 했지만 졸업 때문에 억지로 시험을 보고 있다"며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기준을 정했다면 취업한 사람은 제외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최모씨도 "아직도 토익 점수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며 "전공 과목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토익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토익졸업인증제를 도입했던 경희대, 이화여대 등 몇몇 대학들은 학생들의 끈질긴 요구로 제한점수를 폐지하거나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는 등 제도를 수정하기도 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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