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욱
당신은 지금 인생의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다. 당신은 세 개의 거울을 볼 수 있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 그리고 당신의 마음. 백미러는 당신의 자아와 인생의 반추이며 사이드미러는 당신을 스쳐지나가는 타자들의 이야기다.
이 글과 이어질 글들은 '나'를 찾아 헤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아의 탐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에겐 사이드미러에 해당한다. 사이드미러는 직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길을 바꾸거나 유턴하고 싶다면 사이드미러는 중요하다. 이 글은 당신이 다른 길을 생각해 보도록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만의 기어를 넣고 어딘가를 향해 랜덤(random)하게 떠나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19세기 중반의 코펜하겐의 날씨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사내의 마음속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북유럽에도 분명 햇살의 나날이 있었을 것이고, 사랑의 유희와 희망이 있었을 것이며 상업 도시의 활달함과 번잡함이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사내의 가슴속에는 '죄'라든가 '절망'이라든가 하는 칙칙한 어휘가 배회하고 있다. 서울의 거리를 걷는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드리워질 수 있음직한 그 그림자는 그러나 범죄를 저질렀다든지 실직이라든가 이혼이나 실연과 같은 원인 때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문제였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사내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모인 군중은 거의 폭동 직전의 상태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덴마크 국립교회 당국과 홀로 사투를 벌였는데, 그 이유는 덴마크 국립교회가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했던 사나이인 예수의 길이 아닌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의 관료적 공무원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립교회와 싸우기 위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만드는 1인 신문 <순간>을 한창 펴내다 쓰러졌고, 그런 상황에 아랑곳없이 점잖은 추모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국립교회 목사에게 군중은 분개한 것이다.
이 위대한 '자아의 발견자'가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투사로 죽은 것은 아이러니다. 좁디좁은 사방 벽에 갇힌 절망 속에서 수직의 굴뚝 속 저 멀리 창공으로 가는 단독자의 길을 선포한 그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1849)에 한 해 앞서 위대한 '사회의 발견자'인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1848)이 전 유럽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사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는 시대에도 '자아'는 여전히 문제였다. 이 풍경이 '자아'와 '사회'의 문제가 결코 공리주의 정도로는 해결될 수는 없는 이 세상의 사정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남다르게 칙칙한 생각에 빠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된다. 굶주렸던 시절 그의 아버지가 황야에서 신을 저주했다는 것, "한 늙은 사내와 그의 몸종이었던 처녀 사이의 육정의 찌꺼기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사족으로는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져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는 등등.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인생의 '큰 지진'으로 고백하고 있을 정도로 그러한 사건들은 매우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큰 지진' 이후 '나'를 부인하였다. 그것은 진짜 자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짓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나'이다. 처음엔 키에르케고르도 오페라를 좋아하고 어린 약혼녀와의 달콤한 키스를 상상하며 미래를 꿈꾸는 한 남자가 '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미(美)에 대한 탐닉과 쾌락은 영원할 수 없다. 그 다음에 그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사람 구실'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그냥 '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허망한 인간의 유한성에 한숨 짓는다. '나'로서 어딘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여기서 발걸음을 이른바 종교적 실존으로 돌렸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진정한 '나'는 신 앞에 홀로 선 존재다. 키에르케고르가 도달한 것은 기독교의 신 앞이었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 일하고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장과 직원으로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가다가 문득 이게 아니다 싶어서 산을 찾고 교회와 사찰을 찾으며 명상하고 때로는 출가(出家)한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심각하게 '절망'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현재의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우리는 반드시 절망해야 하고, 또 반드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그 절망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 자신이 실망스럽다면 그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완전히 자신을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그동안 철학과 종교가 많은 유익한 결론들을 선물했지만 수많은 인간 개체의 자아들은 여전히 이 복잡하고 냉담한 세계 안에서 당혹스럽다. 이러한 당혹스러움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잊어버릴만하면 등장하는 '자아의 상실'이라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가 격돌했던 시대를 이미 지난 세기로 밀어 넣어 버린 지 한참인데도 여전히 '자아'는 위태롭다. "최악의 사회주의가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낫다"고 한 루카치조차 만년의 정치적 실각으로 유폐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리얼리스트였다." 1987년 마거릿 대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옹호에 사로잡혀 "사회 따위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자아는 지금 행복할까.
당신의 자아는 지금 어떤가? 뒤돌아보지 않고 직진할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선집
쇠얀 키에르케고르 지음, 최혁순 옮김,
집문당, 201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