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우리집 정경오창경
"서울도 눈 왔어? 여기는 밤새 눈이 좀 내렸어. 오늘도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으니까 좀 서둘러서 내려와야 미끄럽지 않을 거야. 눈이 내릴 때 들어오게 되면 고생할 테니 일찍 내려와."
거의 1년만에 집을 떠나서 서울 나들이 중이었다. 밤새 동생들과 수다를 떨다가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는데 남편은 이른 아침부터 전화로 빨리 내려 올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단 하루 동안의 아내 빈자리가 서운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불러 내리려는 남편의 속마음이 훤하게 보이는 전화였다.
"일찍 못 내려가. 오랜만에 올라 왔는데 동대문 시장도 한번 둘러보고, 친구들도 만나봐야지."
남편의 전화를 이렇게 끊고는 아파트 숲이 끝없이 펼쳐진 창 밖을 내다보니 서울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할 뿐 눈이 내릴 어떤 징후조차 없었다.
동생이 일터로 가는 시간까지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도 사고 시골살이를 하느라 뒤떨어진 패션 감각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아이쇼핑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동생들도 각자 일터로 갈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쇼핑을 더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시골행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지난 밤 못 잔 잠이 스르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버스는 공주 근방이었는데 창 밖에는 회색 빛 하늘이 내려와 눈발이 벚꽃처럼 분분하게 날리고 있었다. 부여에 가까워질수록 그 눈발이 더 거칠고 굵게 날리는 것이 터미널 근처에 세워두고 온 차를 끌고 두 고개를 넘어서 집까지 무사히 들어갈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밤새 세워둔 차에는 한 뼘 가까이 눈이 쌓여 있었고 앞 유리는 눈이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와이퍼도 작동하지 않았다. 서울에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눈이 부여에는 그렇게 쌓였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눈보라치는 길을 운전해서 집까지 가는 일이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집까지 가는 길목에는 눈만 오면 빙판길이 되는 고개가 두 개나 버티고 있었다. 그 중 한 고개를 피해 가려면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읍내를 벗어날 때까지는 차량들도 서로 서행을 했고 눈도 쌓이지 않아서 그런 대로 운전을 할 만했지만 외곽 도로에 접어들자 눈발이 더 심해져서 눈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서 그 와중에도 차를 되돌리는 일까지 생겼다. 평소에 항상 다니던 길에서 그런 실수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차를 돌려서 눈 속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을 무렵이었다. 견인차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내 차를 앞서서 달려 나갔다. 어딘가에서 눈길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어디쯤이야?"
남편의 전화였다.
"눈 때문에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눈 걷히면 내일 들어 갈까봐."
"스노타이어로 갈아 놨으니까 그냥 살살 와. 괜찮을 거야."
남편이 그 상황이라면 나는 아예 운전해서 집에 들어 올 생각도 말고 적당한 곳에서 눈을 피한 다음에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남편에게 그런 아량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