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온 농투성이 예수
- 故 전용철 농민을 추도하며
송태영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녘을 걸어가는 한 사람,
저가 누구인가?
대추리 황새울 들녘, 주교리 배다리 울개 들녘,
갈라진 논바닥에 눈물 고여 삭풍마저 매서운 들녘
바람마저 곡소리로 떠도는 들녘
처자식도 없이 홀로 걸어가는 저가 누구인가?
오지 않은 봄을 찾아 홀로 나선 저가 대체 누구인가?
1962년 지천에 흐드러진 보리 새싹처럼 언 땅을 녹이며
흙에서 태어났다. 봄보다 먼저 나왔다.
어머니는 대지였고, 아버지는 농부였다.
할머니는 태를 태워 보령 들녘에 묻기도 하고
태항아리에 담아 두기도 했다.
가슴에 어머니 말씀항아리을 담고 자랐고
인천직업훈련원을 나와 철도청에서 일했다.
꿈을 꾸었다. 꿈길이었다.
선로를 따라 보리 푸른 들녘을 달려
평양역 철도노동자를 만나
대동강역에서 신의주역까지 다녀오곤 했다.
살아서 가보지 못한 땅을 꿈길에서 달렸다.
고향 그리운 날은 어무이역,
고된 야근으로 술병을 끼고 잠든 날은 아부지역,
생각하면 괜스레 쑥스러워지는,
있지도 않은 파꽃 같은 아내역
그 다음 역인 용철이역까지 다녀오곤 했다.
살아서 얻지 못한 아내를 꿈 속에서 만나기도 했다.
땅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메마른 저 들녘, 상처 입은 들녘이 그를 불렀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보령땅에 도착해 가슴 가득 들녘 바람을 들이마셨다.
버섯처럼 작은 지붕 아래
있지도 않은 파꽃 같은 아내와의 살림을 꿈꿨고
초가지붕처럼 비를 피해줄 커다란 버섯을 키웠다.
목숨 같고 자식 같은 알곡들이
몹쓸 가라지 마냥 내동댕이쳐지고
누군가의 저녁상에 한 공기 밥이 되지 못한다면
다시는 들이 없는 땅에 가지 않겠노라 언약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녘을 걸어가는 한 사람,
저가 누구인가?
칠흙 같이 어두운 새벽길 홀로 걸어가는
저가 정녕 누구인가?
풀 한 포기 꿈꾸지 않는 땅 여의도였다.
가지 않으리라던 다짐도 잊고
한달음에 내달렸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절벽 위에서
기도하고, 외치고, 부딪히고, 싸웠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을 폭파하던 날처럼
흙에서 난 생명들이 울부짖었다.
방금까지도 동지들과 함께 함성이었던 그가
외마디 비명이 되었다.
다시 함성이 될 비명을 남기고 뿌리가 되었다.
방패마저 무기가 되는 땅 여의도에서
그를 데려간 자 누구인가?
그가 살아 누리지 못한 내일을 누가 되찾을 것인가?
11월, 굴욕의 달력을 되넘길 자 누구인가?
남은 세월의 몫까지 다 살아버린 자여.
그렇게 혼자 가려고 남의 몫까지 두 배, 세 배로 땀 흘렸던가?
누군가 애통할까봐 파꽃 같은 아내도 얻지 않았던가?
친구가 외로울까봐 매일 밤 동지들을 위해 기도했던가?
한없이 멀리 가려고 낮은 것들의 잎사귀 하나까지 부여잡고 눈물 흘렸던가?
그렇게 서둘러 가려고 그토록 바삐 투쟁했던가?
그렇게 빨리 가려고 그토록 사랑했는가?
몹쓸 세상에 쓰러진 모오든 것들
그토록 사랑했는가?
알알이 성글게 맺힌 쌀알이 되어
밥이 되어 우리에게 들어오라.
북녘 아이들에게 김 나는 한 공기 밥이 되어라.
논바닥처럼 갈라진 인류의 가슴 속 일용할 양식이 되어
더운 피가 되어라.
꿈꾸는 자의 들녘이 되고
꿈 잃은 자의 꿈이 되어라.
그리고 다시는 울며 여의도에 가지 말아라, 다시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녘, 수의를 입고 걸어가는 한 사람,
장례도 없이, 죽어 죽지 않은 저가 누구인가?
관을 들고 걷는 저가 누구인가?
자신의 십자가를 들고 걷는 저가 누구인가?
산처럼 선한 저의 두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손톱 부서진 저의 두 손은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가?
갈라지고 고랑진 저의 두 발은 어느 곳을 향해 걸었는가?
어찌하여 저는 홀로 걷는가?
누가 저와 함께 삭풍의 들녘 겨울을 건널 것인가?
그는 이 땅에 온 농투성이 예수.
누가 저와 함께 우리들의 갈릴리
이 땅의 들녘을 거닐 것인가?
갈릴리, 갈릴리로 가자
갈릴리로 가자. 갈릴리로 가자.
탯줄을 찾아라.
탯줄을 이어라.
갈라진 논바닥에,
쓰러진 볏단에.
탯줄을 이어라.
탯줄을 타고 온 들녘을,
모든 광야를 내달려라.
탯줄을 타고 들녘 끝까지 그의 소식을 전하라.
찾아라!
이어라!
그의 탯줄을 타고 봄을 부르자.
우리가 먼저 가서 부르자.
갈릴리로 가자.
가서 봄을 부르자.
우리 대신 그가 먼저 찾아 떠나간
우리들의 봄을.
덧붙이는 글 | '에큐매니안'이라는 사이트에도 이 작품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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