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장애의 여러 형태 중 올해 들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이 자폐가 아닐까 싶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자폐증에 대한 한국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이유가 영화 <말아톤>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호야 사랑해> 때문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와 관련해, 나는 자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캐나다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의 아이들이 바로 그 장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혁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고, 토론토에 사는 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지난 10월 이민 3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서울 중심가에서는 고가도로며 육교들이 철거되어 시원하게 뚫린 하늘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저 푸른 가을 하늘보다 내 눈길을 더 사로잡은 것은 전에 없이 늘어난 장애인 시설이었다. 2002년 4월까지 내가 매일 이용하던 지하철 서대문역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는 난공불락의 성(城)이었다. 그 앞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은 이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지상에서 지하철까지 바로 연결되는 노약자·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전동차에는 휠체어 전용 공간까지 새로 마련되었다. 흔히 장애인의 천국이라 불리는 캐나다의 토론토 지하철도 갖추지 못한 시설이다. 광화문 새문안교회 앞에 있던 육교 2개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 횡단보도가 생겼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로 보였다.
그 같은 시설 개선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혁이의 변화와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 변화였다. 우리가 이민을 떠나올 2002년 당시 혁이는 부모와도 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손을 털며 뱅글뱅글 뛰어다니기만 하던 예전의 혁이가 아니었다. 나를 만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눈을 맞추고 말을 곧잘 했다.
혁이를 저렇게 바꿔 놓기까지 저 엄마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싶었다. 사실 곁에서 내가 지켜본 자폐아 부모들의 고통과 피눈물은,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정도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다. 혁이 엄마는 예전에 이렇게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혁이를 나 대신 봐줄 사람이 있다면, 나는 몇날 며칠을 하루 24시간 잠 한숨 안 자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혁이 엄마한테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일반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는 혁이에게 개인 보조교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엄마가 아이 곁에 앉아 교실에서 늘 함께 공부했으나, 올해부터는 혁이만을 돌보는 젊은 보조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0년 전 '진호 엄마'가 그토록 간구하던 꿈이었다.
보조교사의 임금은 국가에서 준다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것은 캐나다에서도 좀처럼 받기 어려운 혜택이다. 서울의 지하철, 혁이가 만난 개인 보조교사, 10년 가까운 싸움 끝에 정상화한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에바다학교 등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의 작은 징표로 보였다.
자폐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겪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이야 '초원이 엄마' '진호 엄마'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저 부모들이 맞닥뜨리는 '경제적 시련'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혁이를 저만큼 좋아지게 만든 가장 큰 힘은 한 달 200만원이 넘는 교육비를 쏟아부으며 혁이 엄마가 동으로 서로 정신없이 차를 몰아대며 다녔다는 것이다.
교육비 부담은 캐나다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 들어 현대 의학의 미스터리로 불릴 만큼 자폐아가 급증하자 캐나다의 주정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폐 어린이들이 주로 받는 'ABA 응용행동분석법'이라는 행동 치료는 1년 치료비 학비로 4만~6만 달러를 요구한다. 보통 가정의 1년치 생활비다. 6세까지 지급되는 온타리오 주정부의 지원금 월 4500달러를 받기 위해 1000명에 가까운 어린이가 대기 중이다. 진이는 부모의 각고의 노력으로 6세가 다 지나갈 무렵 가까스로 이 지원금을 받아냈다.
그렇다고 진이 부모의 경제적 부담이 끝난 것은 아니다. 1주일에 하루 일반학교 특수반에서 공부하는 것을 뺀 나머지 교육은 특수센터나 사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진이에게 꼭 필요한 교육을 시키기 위해 진이 부모는 1500달러를 따로 부담해야 한다. 보조교사 비용을 제외한 모든 교육비를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한국에 비하면, 부담이 조금 덜 하지만 이민자 처지에서는 매우 버거운 액수다.
자폐라는 장애를 놓고 본다면, 캐나다라고 지원 정책이 한국보다 뾰족하게 나을 게 없다. 한국이 그만큼 좋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의 전반적인 장애인 정책이나 시설이 좋아진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들이피눈물로 일구어 낸 '눈에 띄는 부분'일 뿐이다. 모두가 '함께 걸음' 하는 사회가 되기에는 너무나 험하고 먼 길이 남아 있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토론토 북쪽 지역 주택가 한가운데에는 아침마다 장애우를 실어 나르는 수십 대의 특장차들로 붐빈다(이명박 서울시장은 특장차를 운영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으나 서울에서 나는 단 1대도 보지 못했다). 장애인 재활·휴식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대로와 맞닿은 센터 앞마당에서 밝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며 대화를 나누는 장애인들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재활센터 바로 옆집에 사는 한국인 선배에게 일부러 물었다.
"장애인시설 보기 싫지 않으세요?"
"왜?"
"한국에서는 자기 동네에 이런 시설이 들어서는 걸 반대한다던데… 집값 떨어진다고…."
"소가 웃겠다. 멀쩡한 집값이 왜 떨어지냐? 정신 나간 사람들 아냐?"
저 선배는 1989년에 이민을 왔다. 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의 한 지역에서 장애인 시설 이전을 두고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인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근에는 이같은 시위 풍토가 농촌 마을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요즘 한국의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벌인다는 시설이나 처우 개선도 좋지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바뀌지 않는 한 그것들은 영원히 빛 좋은 개살구로 남을 공산이 크다.
'사람'이 사는 시설을 두고 '혐오' 운운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캐나다에서라면 꿈속에서도 생각 못할 범죄다. 들끓는 비난 여론에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장애우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협력 문제도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
청각 장애를 지닌 우리 아이 시경이는 토론토 어린이병원에서 11월 29일 인공 와우수술을 받는다. 이 수술을 결정하기까지 6개월 동안 검사를 받았다. 이빈이후과 전문의, 청각사(Audiologist), 치료사(Therapist)가 자기 전문 분야에서 각종 검사를 한 다음, 함께 모여 회의하고 수술을 결정했다. 이 과정의 중심에 선 전문가는 의사가 아니라 청각사이다. 각 전문가들이 상대방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자세가 이 같은 협력을 가능케 한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협력이 나에게는 낯설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단순한 협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서는 더없이 긴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까닭은 간단하다. 특정 전문가가 "네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하며 다른 분야 전문가의 전문성을 전반적으로 불신하기 때문이다. 직업 자체의 서열화 혹은 위계가 아이의 치료나 재활보다 더 중시되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10여 년 전 서울의 어느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시경이가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이비인후과 의사와 간호사들은 특수학교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1년 후 다시 그 병원을 찾았을 때 나는 간호사에게 진심으로 부탁을 했었다.
"앞으로 청각장애 판정을 받은 아이의 부모에게 특수학교를 가르쳐 주세요. 당신들이 할 수도 없는 일인데, 왜 저 교육 자체를 무시합니까? 학교 목록 한 장만 쥐어 줘도 부모에게는 빛이 됩니다."
혁이의 놀라운 변화와 여러 모로 변한 서울 풍경을 지켜보면서, 지난 3년 동안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및 교육 환경, 외부 시설이 얼마나 많이 개선되었는가를 실감했다. 부분적으로는 감동했다. 그러나 히딩크 표현을 따르자면 "여전히 배가 고프다", 고파도 심각하게 고프다. 다름 아닌 핵심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장애시설을 혐오시설이라며 내치는 집단 이기주의가 두더지처럼 솟아오를 때마다 망치로 내리치는 사회적 분위기와 배려. 저같이 무도한 님비현상이 다시는 고개 들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기강.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여론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 성숙한 사회를 재는 척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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