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왜 그러세요? 저 아세요?"

22살 때 갔던 신불산 눈꽃을 기억합니다

등록 2006.01.01 12:42수정 2006.01.0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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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신불산.
1990년 신불산.박미경
내 나이 22세 때. 눈보라가 치던 어느 휴일에 동료들과 함께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신불산에 올랐다. 산 중턱까지는 눈이 그다지 많지 않아 힘든 줄 몰랐다. 그런데, 정상에 가까워지니 영하의 기온에 녹지 않은 눈이 종아리 높이까지 쌓여있었다. 걸을 때마다 눈 속에 푹푹 빠져 산행이 조금 힘들었다. 비록 더디지만 한 발 한 발 걷다보니 어느새 억새밭이 있는 평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산에 오를 때는 몰랐는데, 평원에 도착해보니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꽃을 구경하려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한 50m쯤 앞에 어떤 아저씨가 웃으면서 앞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차례차례 눈 뭉치를 던지는 게 아닌가. 피해자(?)들은 모두 여자였다. 다들 놀라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고, 아저씬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일행이거나 아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터벅터벅 내 갈 길을 걸었다.


좀 전에 봤던 그 아저씨 옆을 지나칠 때였다.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내 귀와 볼이 얼얼해졌다.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낯선 그가 초면인 내게도 눈뭉치를 던진 것이다. 아니 던졌다기보다는 내 볼을 눈으로 살짝 때린 것이 정확하다. 추위에 얼었던 볼이 아프기도 하고 놀라서 격앙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저 아세요?"
"……"

그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그저 장난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나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내 뒤를 따르던 동료들에게도 눈을 던지기에 바빴다. '으악'하고 모두들 웃으며 도망치기만 했다.

'웃기는 아저씨네…. 자, 복수다!'

나는 얼른 눈을 뭉쳐 그를 향해 힘껏 던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웃으며 눈싸움을 하다보니 추위는 물러간지 오래고 어린아이처럼 너무 신이 났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누군가가 피워놓은 모닥불 옆에 가서 언 손을 녹였다. 우리말고도 남자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삼성SDI 사원들이었다.

모닥불이 시원찮으니 함께 손을 쬐던 남자사원이 갑자기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어버렸다. 불길은 순식간에 확 치솟았다. 모두들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는데, 모닥불에 바짝 다가가 있었던 한 남자사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게 아닌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큰 일이 난 줄 알고 그를 쳐다봤다. 눈썹이 홀라당 다 타버리고 흔적도 없었다. 처음엔 큰 불상사가 난 것 아닐까하고 걱정했던 우리는 얼굴에 아무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제야 '푸하하'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날아드는 눈뭉치에 겁먹은 동료가 보인다.
날아드는 눈뭉치에 겁먹은 동료가 보인다.박미경
우린 모닥불에 몸이 따뜻해지자,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길을 지나던 남자들이 우리들을 향해 쉬지 않고 눈 뭉치를 던지며 촬영을 방해했다. 동료 중 몇 명은 겁을 내며 눈 뭉치가 날아올 때마다 "엄마야"하며 벌벌 떨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우린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눈밭을 뒹굴며 신나게 놀다가 하산을 서둘렀다.

눈길이 미끄러워 나무를 붙잡고 조심조심 걸으려 산을 내려가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 걷던 웬 남자가 갑자기 내 발을 걸어버린 게 아닌가. 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져 산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게 꼭 미끄럼 타고 하산하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이러다 다치는 건 아닌지 겁이 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내려갔지만 스릴만점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일부러 나를 넘어뜨린 그 덕분에 예상외로 빨리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울산 지방에 눈이 온 탓일까. 그 날은 유난히 장난기 많은 낯선 이들 때문에 황당한 일도 겪고, 조금 위험한 일도 있었지만 마냥 즐거웠다. 앨범을 뒤적일 때마다 그때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볼 때면 가까운 신불산으로 눈꽃 여행을 떠나고 싶어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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