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에 담은 사원 사랑장옥순
"여보, 부엌에 있는 홍시 하나 먹어도 되지?"
"안돼. 그건 좋은 거니까 그 옆에 있는 물렁물렁한 것으로 먹어."
"아니, 마누라 말고 이 홍시를 먹을 사람이 또 있어요?"
약이 오른 내가 정색을 하니, 남편도 변명을 합니다.
"그 홍시를 닦느라 내 어깨가 빠질 지경이구만. 좋은 것은 우리 사원들에게 갖다 줄 거야. 내일 아침 시무식 때 쓸 거니까 손대지 말아요."
새해 벽두부터 남편에게 푸대접 받는 것 같아 서운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내가 참기로 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대기업에서 자신의 젊음을 다 보낸 남편이 명예퇴직과 함께 마련한 일자리에서 이제나마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니 그가 하는 대로 보아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05년 2월 초, 새로운 일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찾아간 강진에서 처음 만난 20여 명의 생활설계사들을 마음으로부터 아끼는 걸 일의 시작으로 삼았던 남편. 남편은 2월의 차가운 주말을 들에서 보냈습니다. 주말이면 집에 올라와 쉬는 대신 소쿠리와 손칼을 들고 쑥을 캐며 회사 떠난 빈 자리를 채우고, 쑥 한 포기 캘 때마다 거기에 사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쑥을 캘 수 없는 계절이 될 때까지 대여섯 번이나 캐온 많은 쑥으로 사원들에게 쑥떡을 해준 남편의 진정성이 통했는지, 남편은 어느 대리점보다도 탄탄하게 사원들을 이끌어 안정적인 직장으로 거듭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다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사원들을 감동시키는 게 일보다 먼저라던 소신에, 눈 속에서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는 연로하신 설계사님들은 회사의 보물이라고 말하는 남편.
일흔을 넘긴 분들도 열심히 일하며 고객의 계약서를 컴퓨터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답니다.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 같으신 설계사님들을 모시는 일, 젊은 설계사님들을 유치하여 회사를 키우는 일에 혼신을 다 하는 남편은 그 분들이 회사의 보배이며 자신을 살게 하는 원천이니 떠받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고 챙겨주라고 주문하시는 어르신들이니 이쯤 되면 나는 남편을 일터에 빼앗긴 게 분명합니다. 늘 무슨 일로 사원들을 감동시킬까 궁리하는 남편에게 나는 늘 개밥에 도토리라고 푸념하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년을 넘긴 남편들이 일자리를 잃는 게 보통인 세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모습만으로도 위안을 받기 때문입니다.
지난 12월 23일, 제가 태어나서 가장 멋진 자리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출판기념회에도 남편은 가지 못 했습니다. 눈 속에서 출근하는 사원들은 두고 마누라의 행사장에 갈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임을 잘 알기에 나 혼자 눈 속에서 기차를 타고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서운해 하지 않았습니다.
시골 큰아주버님께서 우리 식구 먹으라고 보낸 귀한 홍시를 몇 시간 동안 닦고 손질해서 상품처럼 포장하고 다듬어서 통째로 회사로 가져갈 준비를 하던 남편이,
"여보, 이거 기사감 아닌가? 당신이 시민기자라면서 내 이야기는 안 써 주잖아."
"아니, 시민기자의 취재윤리(?)를 어기고 당신에게 유익한 기사를 쓰라고?"
"열심히 사는 사람 이야기이니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해 주는 내게 고맙다고 해야지. 웬 취재윤리를 들먹거려?"
"그럼. 오늘 딱 한 번이다."
누가 보면 홍시 파는 남자처럼 보이는 사진 한 장에 이 기사를 실어 보내며 2006년 한 해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홍시처럼 붉은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일하시고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새해 인사 올립니다. 2006년에도 밝고 건강한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에세이>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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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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