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39회

등록 2006.01.04 09:49수정 2006.01.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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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교는 누가 뭐라 해도 중원 최고의 살수이자, 살수집단의 수뇌다. 그의 무영도(無影刀)는 빠른 가운데 음습하고 날카롭다.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는 가운데 언제 치명적인 공격을 펼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공격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살수는 언제나 단 한 번의 그 치명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 인내하는 자였다. 숫자는 많았지만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이유였다.


(쉽게 당하지는 않겠군.)

하지만 문제는 추학이었다. 일행은 아니라 해도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인물이었다. 한때의 실수를 평생의 업으로 안고 살아가던 인물. 추학이 이 자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일엽 때문이었지만 그는 어쩌면 죽고 싶은지 모른다.

일엽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반드시 일엽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열등감이나 호승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던 사부에 대한 뒤늦은 보은(報恩)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희망이 없는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고역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 허황된 희망을 만들어낸다.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고, 절망으로 빠져드는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줄을 잡으려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줄마저도 놓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추학은 도움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가 여음곡에서 보여준 태도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조직에 대한 절망감만을 표출했을 뿐이었다. 다시 시작해보자는 황원외의 제의에도 추학은 고개를 저었다. 추학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황원외에게 말해주었다. 균대위에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었지만 억지로 관계를 만들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담천의 역시 전월헌과 정당한 승부를 하고 싶었다. 그에게도 무인이라면 가지고 있는 승부에 대한 열망과 호승심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좋소. 좋은 곳이 있소?”


전월헌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물론… 너무 좋은 곳이지. 이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다네.”

전월헌은 말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의 뒤로 담천의가 몸을 날렸다.

-------------

회의의 분위기는 무거웠고 침중할 정도였다. 반당이 죽었다. 그 시신이 돌아왔다.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철혈보의 신화가 마치 질그릇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어서 반당의 죽음을, 그리고 철혈보의 붕괴를 왠지 모르게 은근히 고소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철혈보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대다수의 문파는 당연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적을 앞둔 상황이었다. 설사 철혈보가 무너진다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철혈보의 반당을 죽인 인물이 적에 섞여 있는 것이다.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을까?

“군웅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적지 않은 군웅들이 보았고, 이미 지금쯤 다들 알고 계실 것이오.”

소문이란 무섭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역병(疫病)처럼 한 순간에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말에 말이 붙으며 군웅들의 사기를 곤두박질치게 만들 것이다.

“아마 조만간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군웅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이 시기가 적들로 보아서는 호기일 것이다. 이미 소문은 퍼졌을 것이고 무의식중에 두려움이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적들은 파죽지세로 공격해 올 것이었다.

“독고보주의 실망이 클 것이오.”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화궁의 말이었다. 그 역시 표정은 납덩이처럼 무거워 보였다. 독고문은 부르지 않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부른다면 성급한 결론이 나올지 몰랐다. 구효기는 대신 구양휘에게 독고문을 찾아가 위로해 주길 바랐고, 마침 구양휘는 독고문에게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구양휘는 넌지시 수뇌부의 회의를 소집해 적들의 기습에 대비해 준비를 할 것을 부탁했다. 적들은 분명 새벽이 오기 전에 공격해 오지 않으면 사흘 후에 공격해 올 것이라 말했다. 오늘 밤 안으로 쳐들어온다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이기에 전 인원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효기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정작 구양휘에 대한 것이었다. 구양휘는 분명 병법에 정통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마곡에 들어와 보여주고 있는 구양휘의 모습은 분명 뛰어난 전략가였고, 전술가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자신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지금 불을 환하게 켜놓고 군웅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조언한 것이 과연 구양휘의 생각이었을까?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군웅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병법은 단기간 내에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구효기는 일단 자신의 생각을 접고 입을 열었다.

“곧 극복해 내실 것이라 믿소. 문제는 동요하고 있는 군웅들을 어떻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대처하느냐는 것이오.”

구효기의 지적은 예리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수뇌들도 겉으로 표현은 않고 있었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은 모두 똑같다. 그것에 대해 얼마나 인내하고 극복하느냐의 차이와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 역시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가운데 전달되어 온 반당의 시신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훑었다. 누군가가 뾰쪽한 수를 내주길 바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구효기가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입을 연 사람은 모용화궁이었다.

“이러면 어떻겠소?”

모용화궁이 입을 열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본 맹이 천마곡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천마곡 입구의 붕괴로 우리는 본래 계획을 전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소. 상대의 전력조차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불안감과 더 키워왔던 것이오.”

모용화궁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번갈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매우 모호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우리는 수비하기에 급급했고, 상대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전전긍긍했소. 철혈보와 몇몇 분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큰 낭패를 볼 지경이었소.”

그의 지적은 옳았다. 구효기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말이었는데 모용화궁이 나서 말하자 내심 만족스러웠다. 회의에 있어 좌중의 의견을 취합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좌중에서 먼저 운을 떼어주는 일이다. 먼저 설명하고 설득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면 금상첨화다.

“어찌하면 좋겠소?”

구효기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듯 물었다. 구효기를 바라보는 모용화궁의 얼굴에 얼핏 미세한 웃음기가 흐른 것도 같았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계속하라는 구효기의 내심을 알았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우선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의 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오.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야 하오. 개인적인 욕심이나 자파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서로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하나의 마음으로 뭉치는 것이 우선일 것이오.”

모용화궁의 말에 점차 설득력이 실리고 있었다. 그의 말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매우 정확했다.

“그렇다면 모용가주께서는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오랜만에 칠결방(七結邦)의 방주인 귀영무도(鬼影霧刀) 진대관(陳大棺)이 물었다. 그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용화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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