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당시의 국보 재지정 목록이 <대한민국 관보> 1962년 12월 29일자(호외)에 수록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은 보물(구국보) 제76호에서 신국보 제16호로 변경지정되었는데, 소재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읍 신세동 8번지 잡종지로 표시되어 있다. 신세동에 있는 전탑이라 '신세동전탑'이라 하였는데, 뭐가 이상한가?
요컨대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은 국보를 재지정할 때 옆동네의 이름을 잘못 빌려와서 붙여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고, 단지 새로운 행정구역의 변경에 맞춰 세밀하게 문화재의 지정명칭을 바로 잡지 못한 사례로 보는 것이 옳다.
처음에는 신세동이었다가 나중에 법흥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면, 문화재명칭도 '신세동칠층전탑'이 아니라 '법흥동칠층전탑'이라고 고쳐주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나, 설령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문화재명칭을 쉽게 고쳐주는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그렇다면 이왕에 말이 난 김에 이곳 신세동칠층전탑의 명칭 및 행정구역변경과 관련한 연혁을 한번 되짚어보기로 하자.
고문헌과 고지도에 이곳 전탑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여럿이고 또 그 시기도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맥락의 유물이라는 의미로 처음 채록된 것은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박사 일행이 1912년에 이곳을 탐방할 때에 남긴 조사보고서와 사진자료가 아닌가 한다.
즉 이들 일행이 강원도와 경북 일대를 대상으로 삼아 고적조사에 나선 것은 1912년 가을이었고, 그 일정에 포함하여 안동지역에 머문 것이 그 해 12월 3일부터 5일까지였다. 이 당시의 조사대상과 유물사진목록은 <대정원년조선고적조사약보고>(1914)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조사내역을 엿볼 수 있다.
여길 보면, 안동일대의 전탑은 물론이고 문묘 대성전, 향교 명륜당, 태사묘, 영호루, 영가루, 관왕묘, 법룡사 철불상 등이 두루 보이는 가운데 "읍동칠중전탑(邑東七重塼塔)"이라고 표기된 유물이 보인다. 이것이 지금의 '안동신세동칠층석탑'이다.
그리고 사진목록에 가서는 "읍동(부내면 용상리) 칠중전탑 (고 약 55척)"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세키노 일행의 일정표에 따르면 이 사진을 촬영한 날짜는 1912년 12월 3일이었다. 이 사진은 우리가 흔히 <조선고적도보>를 통해 익히 구경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을 말하는데, 전탑의 바로 옆으로 몇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 있고 또 전탑의 전면에 군데군데 이가 빠진 듯이 허물어져 내릴 듯한 그러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곳을 "부내면 용상리(府內面 龍上里)"로 적고 있다는 대목이다. 신세동도 아니고 법흥동도 아니고, '용상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었더라면, 혹여 지금의 신세동칠층전탑은 '용상리칠층전탑'으로 명칭이 굳어졌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4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경상북도 고시 제67호 '안동군면내동리의 명칭 및 구역'에 '신세동(新世洞)'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여기 보면 신세리, 용상리, 용하리, 율세리의 일부가 합쳐 신세동이 이뤄졌음을 엿볼 수 있다. 만약에 이러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신세동칠층전탑은 '용상리칠층전탑'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상리'라는 지명은 그리 오래 유지되질 못했다. 세키노 일행이 다녀간 지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안동군내의 행정구역 통폐합이 일어난 탓이었다. 물론 이러한 행정구역통폐합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이곳 안동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뤄진 행정조치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때의 행정구역조정으로 '용상리'는 사라지고 '칠층전탑'이 자리한 동네의 이름은 '신세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4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경상북도 고시 제67호 '안동군면내동리의 명칭 및 구역'에는 "신세리 잔부(新世里 殘部), 용상리 잔부(龍上里 殘部), 용하리 잔부(龍下里 殘部), 율세리 일부(栗世里 一部)"가 합쳐 "신세동(新世洞)"이 이뤄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신세동'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신세리'가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것과 무관하게 '칠층전탑'은 '용상리'였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신세동'으로 소재지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개념은 곧 1914년 7월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금의 '법흥동'과 같은 명칭은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 지명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법흥동이란 지명은 이곳이 '법흥사(法興寺)'라는 절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적인 근거는 확실하지만 공식적인 행정지명으로 드러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듣자하니 1931년 4월에 안동읍 승격과 더불어 '신세동'이 신세정(新世町)과 영남정(嶺南町)으로 분할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왜색지명을 없애는 과정에서 다시 신세정은 '신세동'으로, 영남정은 '법흥동'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의 변천으로만 본다면, 법흥동의 뿌리는 곧 신세동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점에서 옆동네의 지명을 잘못 붙여 오늘날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착오이자 명백한 오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24년에 발행된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에는 안동신세동칠층전탑에 관한 유물등록내역이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 석탑의 명칭이 '안동신세동칠층벽탑'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소재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신세동'으로, 그리고 "대정 5년(즉 1916년) 3월에 총독부에서 수리했다"는 사실이 비고란에 적혀 있다.
<조선고적조사약보고>나 <조선고적도보>에서 '안동읍동칠중전탑'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던 이 전탑이 '신세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여러 군데서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 등재된 내용이다.
이는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공표되어 '고적급유물등록대장'을 작성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것으로, 여기에 등록번호 제146호 '안동신세동칠층벽탑'이라는 항목이 들어있었다. '전탑(塼塔)'이라는 표현이 '벽탑(벽塔)'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지만, 어느 것이나 벽돌탑을 의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와 아울러 1916, 17년 경의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조선총독부, 1942)에도 '안동군' 항목에 칠층전탑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여기에 소재지가 '안동읍 신세동 법흥(法興)'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자료가 남아있음도 함께 적어둔다.]
그리고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이 유물의 소재지가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신세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조금 더 세월이 흘러 1934년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처음 보물지정이 이뤄지던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이 당시의 보물지정이 결국 1962년 국보보물재지정과정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34년 8월 27일자로 이뤄진 보물지정내역에서 보물 제76호 '안동신세동칠층벽탑'이라 하고, 소재지가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읍 신세동 8번지 잡종지'라고 한 걸 보면, 국보 지정번호만 달라졌을 뿐 기본적인 사항은 해방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3년에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1934년 8월 27일자로 첫 보물지정이 이뤄질 당시에 '안동신세동칠층벽탑'도 이 대열에 포함되었다. 지정번호는 제76호였고, 소재지는 '경북 안동군 안동읍 신세동 8번지 잡종지'로 고시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이름은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국보를 지정할 때에 이웃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여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니었고, 그 이름의 연원을 따져 올라간다면 1914년 이후, 그리고 특히 1934년 8월에 보물로 지정된 이후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공식지정명칭'으로 줄곧 사용해왔던 것이었다.
물론 해방 이후에 이곳의 지명이 '신세동'에서 떨어져 나가 '법흥동'으로 바뀐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더구나 1962년의 시점에서 본다면 국보재지정 과정에서 이왕에 그렇게 할 바에는 행정구역변경에 따른 지정명칭까지도 바로 잡아주는 등의 행정적인 배려가 필요했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더라도 오래도록 '신세동칠층전탑'으로 널리 알려진 내력에 비춰보면,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명칭을 그냥 지니더라도 아주 틀렸다고는 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지금에라도 그러한 이름을 고쳐 행정지명에 맞춰주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문화재의 내력 자체를 인정하여 약간 어긋난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용인해도 무방한 것인지는 좀 더 깊이 고민해볼 여지는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왕에 이름을 바꿀 량이면, 구태여 행정지명을 따라 '안동법흥동칠층전탑'이라는 식으로 바꾸기보다는 이곳의 절터 이름이 '법흥사'였다는 사실이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는 만큼 그냥 '법흥사지칠층전탑'이라는 식으로 고치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조선건축사론의 저자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건축과 석탑 등에 대한 상당한 실측조사 및 사진자료를 남긴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동경제대 건축과 교수)가 일찍이 <건축잡지> 1934년 7월호에 게재한 "경상북도 안동군 및 영주군에 있어서 신라시대건축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이 전탑을 "폐법흥사칠층전탑"이라고 명칭을 붙인 사례가 엿보인다.)
이 부근에서 '법흥사'라는 명문이 든 와편이라도 수습된다면, 이 작업은 훨씬 더 힘을 얻을 것이나 지금까지 드러난 문헌자료만으로도 '법흥사지칠층전탑'이라고 고친들 큰 하자는 없어 보인다.
| | 안동 신세동전탑의 '수리전' 모습에 대하여 | | | |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저질러놓은 잘못된 고적수리로 인하여 해당 유물을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로는 석굴암 석굴, 익산미륵사석탑 등이 있고, 안동신세동칠층전탑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시절로서는 최첨단공법이라고 간주됐던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라버려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익산미륵사석탑의 경우 치과용 드릴까지 동원하여 벌써 몇 년째 시멘트의 흔적을 떼어내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보면 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안동신세동칠층전탑도 보아하니, 전혀 석탑이나 전탑의 기본양식에 어울리지 않게 기단부를 완전히 싸발라놓은 듯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예전 자료를 뒤져보니, 고적수리라는 명목으로 이곳(안동지역의 전탑을 모두 포함)을 고쳐 세운 것이 1916년 3월의 일이라고 되어 있다.
사방으로 떨어져 내린 벽돌을 다시 끼워 넣고, 흩어진 기단부를 다시 수습하여 놓은 것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지만, 뭐가 그리 급했던 것인지 아래쪽은 봉분을 만들어놓듯 동그랗게 시멘트를 발라놓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수리직전의 상황은 어떠했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조선고적도보해설> 제4책에 수록된 해설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이 글은 세키노 타다시의 조수로 활동했던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1912년에 세키노 일행이 안동지역을 탐방했을 때에도 동행하였으니 당연히 그 시점에서 목격하고 채록한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태여 아래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일지만, 사진을 통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없는 기단부 쪽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다음의 설명문이 무엇보다도 많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안동읍동칠중전탑(安東邑東七重塼塔) 도판번호#1544, 1547, 1548, 1549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읍동쪽 약 12, 3정(町)에 있는 칠층의 전탑(塼塔)으로 높이 약 55척이다. 기단은 현재 손괴(損壞)되었으나 당초(當初)에는 이성(二成)의 석단(石壇)이었던 것 같고, 하성단(下成壇)에는 묶음을 지어놓았는데 묶음 사이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과 같은 것을 양각(陽刻)하였다. 더욱이 마손(磨損)이 많아 겨우 그 형태를 방불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각층의 탑신(塔身)은 회흑색(灰黑色)의 벽돌로써 쌓았고, 추녀는 벽돌을 번갈아 쌓아내어 지송(持送, 모치오쿠리)으로 삼았고, 옥개(屋蓋)는 당초에는 기와로써 덮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대개 궤락(潰落)하여 가까스로 그 형적(形迹)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제2층 이상의 탑신은 두드러지게 저왜(低矮)하도록 하고, 또 차츰 그 넓이를 감(減)하며, 추녀도 역시 따라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감축(減縮)하였는데 이로써 안정(安定)의 권형(權衡)을 얻었다. 그 노반(露盤) 이상을 잃어버린 것은 애석한 일이다. 초층(初層)의 남면(南面)에 입구(入口)가 있다. 내부(內部)의 천장(天井)은 벽돌을 사방으로부터 차례대로 들여낸 것으로 이뤄졌고, 중앙에 중심주(中心柱)가 들어갈 만한 곳이 남아 있다. 생각건대 중심주는 목조(木造)로서 각층을 관통(貫通)하여 상륜(相輪)을 받치던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보면 1912년 이전에 이미 이곳은 기단부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의 원형이 이중기단형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는 것도 확실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략 추정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들이 남긴 사진자료가 좀 더 풍부히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자료의 제약으로 정확한 원형을 고찰하는 것에는 제약이 없지 않다고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일제강점기의 문서자료와 유리원판자료를 통해 일정 부분 기본적인 자료확인은 가능하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기단부 원형복원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 이순우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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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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