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교수오마이뉴스 남소연
언론의 기능은 단순히 현상을 전파하는 데에 있는가? 보다 발빠르게 보도하기 위해서 단순 정보 위주의 기사를 작성해야만 하는 지금의 언론 환경 속에서 시민들은 쏟아지는 정보에 날카롭게 대응할 만한 시야를 갖추지 못한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것이 사회 속에서 발생시키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시간의 지연'이 필요하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하여 차분히 두고보면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디 우리 언론 문화가 그러한가? 휘발성이 가득한 이 인터넷 공간에서는, 게다가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이 전자 공간에서는 그 때 그 때 구미에 맞는 정보성 기사만 살아남으며, 그에 대한 댓글문화가 토론의 기능을 대신한다.
댓글문화가 그리는 싸늘한 무비판적인 인신공격의 장 속에서 저널리즘이 제공해야할 것은 바로 '여유'다. 사람들에겐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는 것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한 이 처참한 경제적 상황을 벗어날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적 필연성에 따라 노동하는 사람들이 고상한 생각들을 스스로 해내는 것은 '밧줄을 바늘 귀에 끼워내는 일'만큼이나 어렵다(성경은 '낙타'라고 하지만, 사실 번역상 오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 논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여유없는 자들에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각에 여유가 있게 되면, 모두가 당연시하는 것들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기고, 이렇게 하여 시각의 다양성이 보장된다면 시민 언론의 장은 보다 진정한 토론의 영역으로 승급될 수 있을 것이다.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우왕좌왕한 시민들은 사실, 전적으로 '무죄다'. 죄가 있다면, 줏대없는 언론에 놀아난 죄.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도덕교육을 받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죄. 그 뿐이다.
어릴 적부터 국가를 우선시하는, 부모를 우선시하는 도덕교육을 배워온 우리네 어른들이 황우석 담론을 섣불리 국익과 연결시키는 소박한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물론, 국가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건 아름다운 미덕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나 부모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러하다.
일찍이 공자는 부모가 부모같지 않고 국가가 국가같지 않으면 효나 충이라는 것, 통틀어 '예'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강요될 수 없다며 '예'의 상호성을 주장했더랬다. 시민들을 군화발로 짓밟았던 정당성 없는 정권(과거의 군사정권)에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자식을 구타하고 성폭행하는 부모에게 효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게 '正名'해야만 사리에 맞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잘못된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시민들은 섣불리 국익을 떠올리고, 국익 앞에서는 진실도 중요치 않다는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백번을 양보해도 다르게 생각하기가 힘들다. 아직도 이번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황우석 교수를 지원해야 한다는 선량한 사람들이 늘고만 있다. 한국인이 착하기 때문일까?
나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악습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강박적으로 지켜오다 보니까 변화하는 현상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전통은 전통대로 지켜야하지만, 구습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라는 무덤 위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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