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나루터에는 오늘도 고향을 찾아 돌아온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병자년의 호란 때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이들이었다.
나루터를 가득 매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초관 신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보시오. 이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쳐온 사람이 오십 명이 넘소. 이래서야 내가 부윤께 뭐라고 한단 말이오?”
“도망쳐온 사람이라니 제 집 찾아 돌아온 사람들에게 어찌 그리 섭섭한 말을 하시오. 이거 받고 모른 척 하시오.”
신수인에게 은근슬쩍 은화를 건네주는 이는 시루떡이었다. 신수인은 은전을 받아 챙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러면 곤란한데...”
반년 전, 시루떡은 불현듯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난 장판수를 보고 앞 뒤 가릴 것 없이 그의 뜻에 따랐다.
“조정은 썩었네! 양반네들은 제 배만 불릴 뿐이네!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포로로 잡혀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할 것이네!”
장판수는 전에 없이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말했다. 그즈음 한양에는 부자 양반들만 노리는 도둑으로 인해 포도청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시루떡이 신수인에게 건넨 은전도 그러한 부자들의 창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양 도성 바깥에 있는 주막은 장판수가 이끄는 무리들의 비밀 회합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계화가 술을 담그고 밥을 지으며 차예량과 함께 주막을 운영하고 있었다. 계화는 예전에 두청의 말을 쫓아 차예량을 기만했던 일을 후회하여 스스로 심양으로 가서 사람들을 도우는 일을 해왔다. 장판수는 이러한 계화를 다시 한양으로 데려와 차예량과 혼인시켰다.
“시혹(혹시),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뭘 말이네?”
“제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계화는 장판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주막이 열리자 장판수는 시루떡에게 맡겨 놓았던 자신의 물건들을 가져다 놓았는데 그 중에는 아버지 장한본의 이름이 새겨진 편곤이 있었다. 계화가 비록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졌지만 부모의 이름과 아버지의 편곤은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몰랐지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었을기야.”
평구로가 주막으로 돌아와 장판수를 찾았다. 그는 늙은이답지 않게 아직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두청의 행방을 뒤쫓고는 했다.
“뭐 답이 나왔네?”
평구로는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 전 한양에서 안첨지와 그의 일당이 잡힌 이후로 소식이 감감하다.”
장판수가 사람을 시켜 포도청에 투서를 던져 이들을 사로잡히게 한 결과였다.
“그까짓 놈 이제는 내 앞에 나타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찜찜하네. 그 놈이 거느린 숱한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네?”
“두청을 버리고 우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사람이 많으니 와해된 것이 아닌가?”
장판수는 웃으며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주막의 부엌 옆에 자리 잡은 자신의 조그만 방에 들어선 장판수는 ‘散’자가 새겨진 부러진 칼, 평구로가 준 ‘飛’자 칼, 자신이 애용하는 패도와 칼들, 윤계남이 쓰던 칼,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편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 있었다.
‘검계(劍契)’
장판수는 방안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죽고 먼 훗날이 되면 검계는 사라질지도 몰랐고 그 뜻을 잘못 잡아 두청과 같은 무리가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판수가 정말 걱정하는 것은 과연 검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각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참 힘든 삶이었지. 이제 여동생을 찾았고,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검계를 통해 일가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장판수가 천천히 눈을 뜨니 그는 어느덧 60이 넘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벽에 걸린 칼들은 닦고 닦아서 녹 한점 슬지 않은 채였다. 그의 눈앞에는 문이 열린 채 삿갓을 쓴 다섯 명의 장정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내 얘기는 끝났다.”
장정들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검계는 결코 힘없는 자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내 이름 석자를 잊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 뜻을 잊는 순간 검계는 끝이 날 것이다.”
말을 마친 장판수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그곳에는 구름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장판수는 입가에 한 자락 웃음을 날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덧붙이는 글 | 그 동안 사금파리 부여잡고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좀 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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