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극장 간판 직접 그리십니까?

등록 2006.01.16 09:59수정 2006.01.1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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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젊은 시절에 영화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극장 간판 그림에는 흥미가 있었다.

'저렇게 큰 면적에다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이 얼마나 들까?'
'저런 간판을 그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당시 학교를 오가면서 때때로 바뀌는 극장 간판을 보는 것은 봄날 새순이 돋아나는 가로수를 보는 것 못지않은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정겹기도 하고 두서없이 야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예술이기도 하던 극장 간판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극장 간판만이 아니었다. 그 많던 소극장들도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대신 소극장을 10개쯤 한꺼번에 꾸리고 있는 대형 극장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대형 극장들은 그림 대신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사진으로 내걸었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는 어쩌면 저렇게 깔끔하고 매끈할까 하고 감탄했다. 사진을 보다가 그림 간판을 보니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난 대세가 그리는 것이 아니고 찍어내는 것이니 그림 간판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아직도 극장 간판을 그리신다고요?


내가 사는 소도시에는 극장이 둘 있다. 하나는 모 대학 앞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시내 중심가에 있다. 모 대학 앞은 시대의 추세에 맞게 새로운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사진을 내건다.

그런데 시내 중심가에 있는 또 다른 극장의 경우 외관도 오래되어 보이지만 극장 간판 또한 예전에 해오던 대로 손으로 그린 간판을 내걸고 있다. 물론 나는 이 도시에 처음 살기 시작한 8년 전부터 그 극장의 그런 전통을 봐오긴 했다. 그러나 그때는 죄송하지만 촌스럽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나니아 연대기>와 <청연>
<나니아 연대기>와 <청연>정명희
<외출>과 <형사>
<외출>과 <형사>정명희
그러면서 '세련된 것 좋아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저 극장에서 영화를 보려고 할까', '뭔가 변화에 맞춰서 건물을 새로 올리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곤란할 걸' 해가며 영화 한 편 봐주지는 못할망정 악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극장은 쉬이 망하지(?) 않았다. 그 사이 IMF 구제금융 시대도 있었건만 그 극장은 용케도 살아남았다. 나는 구제금융 시대도 거뜬히 버텨내었기에 그 극장의 내실을 인정하기로 하고 듣는 이 없다지만 더 이상 도움 안 되는 악담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도 가끔씩 그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극장은 차도에서 100m쯤 들어간 곳에 있는데 극장 건물이며 간판이 옛 모습 그대로라서 그 극장으로 들어가노라면 꼭 1980년대쯤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젊은 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 극장의 간판을 즐겨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갈 때가 아니라도 가끔 버스를 타고 그곳을 스쳐갈 때면 습관처럼 어떤 그림이 걸려 있나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곳을 지날 때만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 중 하나였다.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가 용기를 내어 극장 사장님에게 극장 간판을 누가 그리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직접 그리신다고 하였다. 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 극장 간판 그리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한 30년 되었지요.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삼촌(60)에게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삼촌과 함께 그립니다."

- 한 달에 몇 편 정도 그리시는지요?
"대략 6편정도 그립니다."

- 간판은 계속 덧칠해서 씁니까?
"예, 하얗게 페인트칠 한 다음 그 위에 배경그림 그리고 색칠합니다. 그리는 데 하루 정도 걸리고 말리는 데 이틀 정도 걸립니다."

-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무엇인지요?
"<벤허>입니다."

- 슬하의 자녀는요?
"대학생, 고등학생 2남입니다."

- 성함과 나이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나이도 몰라요.(웃음)"

- 앞으로도 계속 이 극장을 고수할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언젠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사장님의 말로는 이 극장이 일제 강점기 때 처음 문을 열었으니 극장의 역사가 자그마치 70년이나 된다고 하였다. 지금의 사장님이 인수한 지는 12년 정도 된다고.

세상에나, 70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화가 상영되었다니 새삼 그 극장이 특별해 보였다.

막연히 역사래야 한 20년쯤 되겠지 생각하고 물었는데 70년이라니, 70년은 사람의 한평생과 거의 같은 세월이 아닌가. 지금 70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고 그리고 늙어 주름진 그 많은 시간 동안 그 극장은 꼿꼿하게 버텨온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의 변화무쌍이 그 극장의 입지를 자꾸만 좁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다. '역사 속으로'를 발음하던 극장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시대조류와는 조금 떨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독이 묻어났다. 한편으로는 그 극장의 70년 역사만큼이나 당당함과 의연함도 느껴졌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극장만큼은 지난 70년을 한결같이 외길을 걸어왔듯이 앞으로도 쭉 그대로 전진하기를 빌어본다.

세월이 느껴지는 극장 전경
세월이 느껴지는 극장 전경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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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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