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 운전을 하고 싶어요"

남편과 헤어진 지 10년...나이 쉰에 자아 찾기 나서다

등록 2006.01.16 11:41수정 2006.01.16 14:1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관광버스 운전을 하고 싶어요. 구경도 하고 좋아하는 운전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자가용을 몰아본 경험 외에는 봉고차 운전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주부가 버스운전을 하고 싶다니.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 좋아하는 내 귀에 관광버스운전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십대 초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복숭앗빛 피부를 간직한 그녀의 눈은 계곡보다 더 깊었다.

그 눈에는 절망과 고통, 인내, 체념과 한 가닥 희망이 짙게 농축되어 있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바탕 통곡의 한풀이를 해 버릴 것만 같았다.

적게는 십 대에서 많게는 칠십 대까지 다양한 구직자들을 대하고 살지만 그녀처럼 두 눈 속에 변화무쌍한 삶을 감추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관광버스 운전을 하고 싶은지 묻지 않았다. 그저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 속에 허덕여 본 자만이 타인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게 마음으로 그녀의 상처를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a 구직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는 다과실

구직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는 다과실 ⓒ 이명숙

"왜 아무 것도 묻지 않으세요."
"......"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와 나의 첫 날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에도 그녀의 깊은 계곡이 자꾸만 허공에서 맴돌았다.


"선생님, 근심걱정 하나 없이 귀하게만 자란 사람 같다는 소리 많이 들으시죠. 그런데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복잡한 기운들이 느껴져요.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러면서도 활기찬 기운 같은 거."

3일째 되던 날, 쉬는 시간에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감 능력은 감정에 대한 다양한 영역들을 세세하게 경험한 후 그 바탕 위에 획득되는 능력이라고 했던 글에서처럼, 그녀와 나는 서로의 내면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엔 유독 여자가 많았다. 프로그램에 참가를 한 구직자들의 성별까지 염두에 두고 선발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성비가 엇비슷한데 그 프로그램은 도저히 성비를 맞출 수가 없어 남자 2명에 여자 10명으로 구성을 했다. 구직에 관련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편, 시댁,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까지, 쉬는 시간이 항상 모자랄 정도로 수다가 이어졌지만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 날, 그녀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파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어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아가씨들이 많은 거 같은데 내 이야기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쟁여놓은 삶들을 풀어놓았다.

나이는 51세. 서울에서 여대를 졸업한 그녀는, '너 아니면 죽어도 안 되겠다'는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풍요로웠다. 남편은 더할 나위 없이 자상했고 돈은 마를 날이 없었다. 아들 둘은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잘 자라주었고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 챙기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가족동반으로 낚시터를 찾아다녔고 매운탕을 끓여먹으며, 단란한 가정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아들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그녀도 아이들도 더 이상 낚시터를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다. 워낙 낚시를 좋아한 남편은 혼자서도 잘 다녔다. 낚시를 다녀온 남편에게서는 항상 비릿한 바다냄새가 났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낚시터를 향하는 남편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옷에 대해서 무지할 정도로 무신경이었던 남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옷맵시를 가다듬는 남편을 향해 "혹시 당신 물고기가 아니라 여자를 낚으러 다니는 거 아니야?"라고 말을 하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에 관심을 갖는 거 외에는 변함없이 잘해 주었고 여전히 자신이나 아이들에게 성실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 2 아들이 "엄마, 오늘 아빠차를 봤어요.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아빠차가 거기 주차되어 있던데요.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 그냥 왔어요"라고 말했다. 아들은 무슨 말인지를 더 할 듯하다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편의 지인들은 그녀가 거의 알고 있었고 행동반경 또한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곳에 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남편의 행동에 대해 지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부정하려고 해도 자꾸만 강한 의혹이 자리를 잡았다. 한 달가량 남편을 지켜보았다. 의심이 꼬리를 물었고 급기야 위경련까지 왔다.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 뒤를 따라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이 되자 남편의 차는 아들이 말하던 그 아파트에 머물렀다. 동 호수를 확인한 그녀는 남편이 들어간 집 앞 초인종을 눌렀다. 여자 뒤에서 남편의 얼굴이 나타났다. 눈앞이 캄캄했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데 입술이 열리질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데 남편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큰 소리를 친 것은 오히려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여기에 있든지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남편은 그 곳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분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편이 택한 여자는 노래방 도우미였다. 친구들끼리 노래방에 갔다 도우미를 불렀는데 중년의 심금을 울리는 그 여자의 노래를 듣는 순간 마음까지 녹아내렸다고 그랬다. 그녀와 결혼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그 여자 없이 못 살겠다고 하는 남편을 두 말 없이 보냈다. 남편은 일부 재산과 아들을 그녀에게 남겨둔 채 자식 셋을 둔 이혼녀인 그 여자의 11평 임대아파트로 들어갔다.

결혼해서 17년을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재산관리를 해 본 적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그녀 앞에 IMF는 가혹했다. 남편이 주고 간 재산과 사업체는 고스란히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24평 아파트 한 채뿐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들 대학은 보내야 했다. 마트 캐셔, 판매직, 보험회사 등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버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남편에 대한 분노로 이를 악물고 견뎌낸 세월이 십 년. 아들들은 어느새 스물여섯, 스물넷이 되어 있었다. 이제 저희들을 위한 삶이 아닌 어머니 인생을 사시라는 두 아들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결혼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했던 것이 어리석었어요. 그것을 남편하고 헤어지고 난 후에야 알았어요. 결국 내 인생은 내 것이었던 것인데 소설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처럼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삶을 살아왔던 거예요. 남편의 틀 안에 갇혀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닥친 불행 앞에서 어떻게 대처를 했겠어요. 주체적인 내 삶을 살았다면 아마 덜 고통스럽게 살았을 거예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는 동안 프로그램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도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스캇펙의 글처럼 고통 자체가 아닌 피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더 큰 통증을 느껴 본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남편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외로운 거라고,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은 고독을 잠시라도 뉘이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상처를 한 땀 한 땀 꿰매가며 깨달을 수 있었다.

관광버스운전을 하면서 철마다 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산, 고요와 폭풍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보름달,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헤치고 오십이 지나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선 그녀의 자아 찾기 행진에 나는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고층건물 사이로 겨울 햇빛이 루비처럼 빛나는 오늘, 날개를 단 그녀는 어쩌면 겨울 설산 위에 우뚝 서 상처 속에 허덕이는 다른 영혼을 다독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5. 5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