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 형, 쏘주 한 잔 하입시다"

유용주가 5년 만에 펴낸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

등록 2006.01.24 14:07수정 2006.01.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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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주 한 잔 합시다>
<쏘주 한 잔 합시다>큰나
유용주 시인은 몇 해 전 MBC <느낌표>라는 프로를 통해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솔·2000)가 소개된 뒤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다. 그가 새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큰나·2005)를 펴 냈다.

유용주는 원래 시인이었다. 1991년 <창작과 비평>에 '목수'외 2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그동안 <가장 가벼운 짐>(창비·1993), <크나큰 침묵>(솔·1996)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낸 바 있다. 유용주의 최종 학력은 중졸도 아닌 중학교 1년 중퇴가 전부다. 그는 중국집 배달원, 구두닦이, 과자공장 직원, 금은방 종업원, 막노동판 시다 등 우리 사회의 온갖 밑바닥 삶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우연히 시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유용주를 일약 우리 시대의 문사로 자리매김한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는 이러한 그의 힘겨운 밑바닥 인생의 자전적 체험이 그 바탕이 되었다. 삶의 현장에서 얻은 체험을 건강하고 힘 있는 문체,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낸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는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깊고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가 직접 보내준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나에게 다가온 감동은 대단했다. "관념 속에서 머리로 만든 지식인들의 아포리즘을 일거에 무너뜨린 산문집이다"라는 말을 앞세우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힘겨운 생활고를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면서 얻은 치열하면서도 넉넉한 그의 산문은 자기 아픔 속에 함몰되지 않고 그 아픔으로 더 아파하는 이웃들을 감싸 안으려는 뜨거운 사랑이 숨쉬고 있다.

유용주가 다시 책을 한 권 보내왔다. '이종암 형께 2006년 새해 유용주 인사드림'이라는 자필로 쓴 책 <쏘주 한 잔 합시다>. 5년 만에 펴낸 그의 새 산문집도 산문 정신이나 내용면에서 앞서 펴낸 산문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장면을 짜장면으로 불러야 입안에서 그 맛이 살아나듯 소주도 '쏘주'여야 소주의 쓴 맛이 살아날 것만 같다.

제목에서부터 삶과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특장인 현장성과 직접성이 잘 묻어난다. 이 책은 제1부 '오래된 사랑' 외 3편, 제2부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 제3부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2', 제4부 '봄은 왔건만' 외 9편 등 총 1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산문 몇 군데를 인용해 본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 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 배면에 깔려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중략)...소인은 산으로 숨고 대인은 사람 속으로 스며든다는 말 자주 들었겠지.


그리하여 소소한 일상을 노래하는 작품이 가장 쓰기 어려우며 어려운 만큼 가장 크고 장엄한 노래일 수도 있다는 말일세. <나무젓가락 단청>이나 <흠집>, <금강초롱」과 <송화>와 <水路>를 비롯해 자네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일상의 작은 말씀들이 어떻게 우주적 발언의 차원으로 변해가는지 똑똑히 볼 수 있어 반가웠다네.


인용한 부분은 '이정록 시집 <제비꽃 여인숙>을 읽고'라는 부제가 붙은 '쓰다듬는 나무가 세상을 키운다'의 일부분이다. 지역의 후배 시인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의 문학 정신과 자세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생명 평화 탁발 순례'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뜻이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죄가 깊다는 반증이겠지요. 죄는 무량하고 우리네 인생은 찰나에 끝나지만, 끝내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게 '상생의 빈손 여정'이 곧 나눔의 아름다움으로 눈부시게 변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중략)...아무리 독이 많아도 역시, 사람보다 좋은 약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들고 언 몸을 녹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도법 스님과 생명 평화 탁발 순례에 길 떠나는 이원규 시인을 그리워하며 쓴 산문 '아니 갈 수 없는 길'의 일부분이다.

이번 산문집의 백미(白眉)는 제2부에 실린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라고 말하고 싶다. '17일간의 승선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산문은 저자 유용주가 박남준(시인), 한창훈(소설가), 안상학(시인) 등과 현대상선을 타고 부산항에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항까지 함께 한 항해 일지(日誌)다.

한국 문단의 내로라하는 술꾼들이요 천하의 한량들인 이들의 공동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소설보다 영화보다도 더 재미있다.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형, 오늘밤 별빛 이불 덮고 한 번 자볼까?"
나는 관운장 같은 안의 청룡언월도를 쓰다듬으며,
"저 이불은 한 번 덮고 자면 깨어나지 못해.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지."
"정말 그럴까?"
"아무렴, 저 이불은 평생 딱 한 번 덮는 이불이야, 우리가 이 지구라는 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덮는 이불이지. 그때를 위해 아껴두고 오늘은 그냥 내려가자. 우리가 숨넘어가는 그 순간, 끌어당겨 덮어도 늦지 않거든. 참자."
"--------"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내가 한심스럽다. 운치도 없는 놈, 시도 모르는 놈, 재미없는 놈, 융통성 없는 놈, 꽉 막힌 놈, 재부박머리 없는 놈, 한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한 칼 내리친다.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 쿨럭쿨럭---. 아암, 독하고 말고---."(135쪽)

그렇다면 정답은 나와 있다. 모래 한 알갱이가 사막을 이루는 씨 하나이듯 물 한 방울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첫 핵이듯 나는 이 지구별을 이루는 먼지 하나로서 내 온 존재를 다해 구성원의 역할을 피하지 말고 수행해야 하리라. 내 가슴 깊은 곳에서 17일 동안 참고 참은 큰 파도가 용솟음쳐 올랐다.(141쪽)


유용주와 포항 바닷가에서 과메기를 안주로 삼아 소주, 아니 '쏘주' 한 잔 하고 싶다.

쏘주 한 잔 합시다

유용주 지음,
큰나(시와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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