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고립된 한 작문교사의 자살

[서평] 이남희 장편소설 <세상의 친절>

등록 2006.01.26 20:03수정 2006.01.2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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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장편소설 <세상의 친절> 앞표지
이남희 장편소설 <세상의 친절> 앞표지문이당
지난해에 많은 소설을 읽지는 못했지만, 한 지식인의 세상살이의 험난한 과정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문제작을 한 편 읽을 수 있었다. 중견소설가 이남희의 장편소설 <세상의 친절>(2005년 8월 10일 문이당 펴냄)이다.

고등학교 작문 선생이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목을 매어 자살했다. 원인을 생략하고 큰 줄거리를 그려내면 이렇게 될 소설 <세상의 친절>.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배경으로 나온 신도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신도시를 배경으로 한,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주인물(主人物)로 한 냄새 특별한 소설이다. 문예반 창작실기 담당 김승재는 참 인기 없는 총각 교사다.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그처럼 까다롭고 빈정거리는 태도 때문인지 김승재는 학교에서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있고 없고를 떠나 학생들은 그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했다. 독신이고, 시인이며,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인데도 그랬다. 언젠가 함께 앉는 짝, 전 시내에게 그의 나이를 물었더니, 그딴 걸 누가 궁금해 하는데? 암튼 되게 늙었을 거야, 라고 대답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 별명은 동태라고 했는데, 딱딱하게 굳은 태도에다 웃는 적이 없는 걸 보면 납득할 수 있었다. -<세상의 친절> 20쪽에서

전학생인 여고생 최유리가 자기네 문예창작 교사 김승재를 학교가 아닌 다른 데서 보았다. 여대생처럼 가장한 뒤, 노골적인 성행위가 나오는 ‘19세 이상 관람 등급’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발견한 것이다. 뒤를 따라가 보니 국어교사 김승재가 지나가는 곳이 사창가가 아닌가.
유리는 김승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한 사내가 사창가에 가는 장면을 묘사한 글을 작문 숙제로 써낸다. 화가 난 김승재의 관심은 유리에게로 기울어진다.

주인물의 삶에 희망이 보이게 되는 장소는 김승재의 집이다. 전시내가 교사 김승재와 자기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헛소문 퍼뜨렸다고 하여 연필 깎는 칼로 전시내를 위협하는 유리. 이 사태를 알리러 달려온 다른 학생의 말을 듣고 김승재가 달려가 말리자, 팽팽한 긴장 끝에 간신히 유리는 살의(殺意)를 접는다. 그리고 그날 밤 김승재의 집에서 사랑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김승재는 살인 미수를 저지른 일이 있었다. 전철 건널목에서 한 여인을 해치려 했던 것. 그 사실이 뉴스로 방송되자 그때의 기억을 어슴푸레하게 떠올리게 되고, 혹시 자신이 그 도시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닌가 하는 지나친 착각을 하여 결국엔 자살을 저지르고 만다.


그 자살 소식을 국어 부장교사 이수완(여교사이며 김승재를 좋아함)이 유리를 상담실로 불러 들려준다.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바로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곧 어른이 될 테니까, 감당할 수 있겠지… 김승재 선생이 죽었단다. 목을 맸다나 봐.”
“어디서요?”
“고래리 산, 자기 할머니 산소 옆에 있는 소나무에서.” -<세상의 친절> 322쪽에서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 시달리며 자라온 김승재는 해리성 인격장애(다중인격)를 겪고 있었다. 연립주택이면 연립주택, 학교면 학교에서 그렇게 고립되어 살아가다가 마침내 세상 속에서 무너지고 만다.


2005년 9월 6일 인사동에서 만났을 때의 이남희씨
2005년 9월 6일 인사동에서 만났을 때의 이남희씨김선영
이남희씨는 언젠가 강연 뒤 “작가가 되어서 좋은 점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무엇보다 나 아닌 다른 이의 인생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대답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잘한 일상은 갖은 볼일과 관계를 내세우며 다른 인생을 기웃거리는 나를 수시로 방해한다. 그러나 지난겨울 그 작업실에 들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작업실 속의 인생은 온전히 또 다른 삶으로서 나를 도취케 하였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이씨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충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86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저 석양빛>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지붕과 하늘>, <개들의 시절>, <사십세>, <플라스틱 섹스>와 장편소설 <바다로부터의 긴 이별>, <소설 갑신정변>,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 <사랑에 대한 열두 개의 물음>, <음모와 사랑>, <황홀> 등이 있다. 사회성 짙은 소설을 주로 발표해 왔는데, <세상의 친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씨는 요즘 <우장춘 평전>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친절

이남희 지음,
문이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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